지난 6월 2일 건축사이신 신삼호 부이사장께서 유엔에이건축사사무소 <설계기록 출판기념회>를 315아트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이날 이인안 이사장님을 비롯한 여러 이사님들과 회원, 실무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축하해드렸는데요. 이번 달 회원 인터뷰는 신삼호 부이사장입니다. 신삼호 부이사장은 1993년 30대 초반 마인건축사무소를 시작하여 30년 동안 건축사로 활동하였습니다. YMCA와의 인연은 1989년 서진건축(대표: 허정도) 근무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건축사로서는 여러 설계 현상공모전에 30여차례 당선되었으며, 20여 차례 이상 각종 건축상을 수상하였으며 특히 대한민국생태환경건축 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17년에는 건축계에서는 처음으로 경남예술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경남건축가회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건축역사에 대한 관심은 대학원 박사과정으로 이어졌고, 현장에서는 경남건축사회 50년사 편찬(위원장)활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
이윤기: 부이사장님은 언제 카톨릭 신자가 되셨습니까?
신삼호: 제가 서진건축에 오기 전에 원건축사무소에서 설계 일을 시작했어요. 대표님께서 건축사무소를 하시다가 경남대학교 교수로 가셨는데요. 당시 사무실이 옛 한국은행 옆에 있었고, 유난히 성당 설계를 많이했어요. 그래서 성당 관계자들하고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되었지요. 결혼하기 전 총각 때 가까운 상남성당에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직원들이 단체로 교리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았어요. 그때 조용범 건축사도 같이 교리반에 다녔는데 영세는 안 받았지요. 그 뒤 서진건축으로 옮겼고 아내와 결혼할 때 상남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했지요. 아내는 결혼하면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어요.
이윤기: 제가 알기로 고향은 부산이신데 어떻게 마산에 오시게 되었습니까?
신삼호: 마산으로 유학을 왔죠. 제가 80학번인데 그 때는 대학에 들어갈 때 광역 단위로 지망할 수 있는 지역을 세 군데로 제한했어요.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는데......저는 서울, 경북, 경남 이렇게 세 곳을 골랐는데, 1차에서 서울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지 않으면 후기를 지원해야 해서 경남대 건축과에 오게되었어요. 당시는 경남대 건축과가 후기였습니다.
경남대학교는 당시 후기 대학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서울 지역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고 경남대학에 오는 경우도 많았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07학번인 한지선 팀장은 "무슨 이야기인지 통 모르겠다"고 하여 함께 웃었습니다.
신삼호: 제가 소위 말하는 베이비 부머 세대잖아요. 57년생부터 63년생까지가 아마 가장 많이 태어났던것 같아요. 그래서 이 세대가 지나갈 때마다 사회문제가 생겼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교육환경과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아 2부제 수업을 했고, 대학입시에서도 경쟁이 가장 치열한 세대였지요. 제가 대학을 갈 땐즌 입시생이 50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대학도 많이 생겨나던 시절이었어요. 아무튼 마산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었는데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보고 싶은 마음으로 마산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네요.
이윤기: 건축을 공부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신삼호: 건축은 사실 작은 형님 영향을 받았어요. 좀 마음 아픈 이야기인데 .....작은 형님이 산재로 장애가 있어요. 아버지하고 집안이 그림하고 글씨 이런 쪽으로 좀 소질이 있었어요. 저희 형님도 건축 노가다 도장 일을 했는데, 손재주가 있어서 간판을 많이 그리고, 아파트 측벽, 목욕탕 굴뚝 이런 곳에 글씨를 많이 적었어요. 당시는 지금처럼 안전 조치가 철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파트 상호 글씨 작업을 하다가 추락해서 사고를 당하셨어요.
그 형님이 중동 건설 붐이 일었던 70년대 후반에 중동에도 다녀왔어요. 형님이 그 때 외국에 나가서 일을 하는데, 영국계 감리회사 젊은 직원들이 나와서 별 하는 일도 없이 월급을 많이 받는 걸 보면서 저런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저는 형님 권유를 받아들여 건축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80년대 초반까지는 건축이 가장 고용을 많이 하는 업종 중 하나였어요. 주택이 절대 부족하던 시절이었고, 돈 있는 사람들이 돈 버는 제일 좋은 방법이었죠. 대학을 다닐때 저희들도 방학 때 현장에서 잡부로 일을 많이 했어요. 질통도 지고, 벽돌도 나르고 그러니까 전혀 전문 기술이 없어도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었고, 당시 건축은 부가가치가 상당히 높았지요.
열 번을 넘게 찍은 건물도 있어요.
이윤기: <설계 기록>을 책으로 내신 이유는?
신삼호: 사실 책 내는 걸 처음부터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책이라고 하면 주로 문장을 통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고, 건축하는 분들의 경우도 책을 내면 주로 작품집 형태로 책을 냅니다. 저의 경우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책을 낼 엄두도 안 냈지요.
약간은 다른 얘기인데 사진에 관심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사진을 찍는 분들 중에는 인물을 찍거나 풍경을 찍거나 하는데, 나는 가장 필요한 게 건축 사진이었지요. 건축 작품을 드러내는데는 사진이 가장 효과적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건축 사진을 찍었는데, 처음에는 명례성당이라든지 유명한 건물을 찍었는데, 소재가 고갈 되어 당시 우리 사무실에서 설계한 건물을 찍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새로 설계하는 건물을 찍는 것도 금새 소재가 고갈되잖아요. 그러다보니 과거에 설계한 건물을 찍게 되었고, 문득 일거양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 찍는 연습도 하면서 과거 기록을 정리하는 의미가 있겠다 하는 생각. 그래서 2021년 무렵에 장기 계획을 세웠어요.
사진을 찍는 친구가 있는데, 아마추어 중에서는 최상급자거든요. 지난 번에 네팔에 함께 사진 찍으러 갔던 바로 그 친구인데요. 이 친구에게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포토샵 하는 라이트룸 그런것까지 배우게 되었죠. 억지로 배운거죠. 사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목적이 있으니까 배워지더라고요.
처음 계획을 세워보니 1년은 찍어야겠더군요. 일단 설계한 건물이 경남 전역에 흩어져 있었고, 또 건물 위치에 따라서 아무 때나 찍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요. 촬영 조건을 맞추다보니 주말에도 가고 평일에도 가고.....예를 들면 역광이라서 낮에 찍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그렇거든요.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기 위해 열번 넘게 촬영하러 가는 경우도 있었어요. 마산대학교 본관 같은 경우도 여러 번 찍었지요. 시나브로 한 일년 정도찍었어요.
처음부터 30년 작품 리스트를 들고 찍은 것이 아니고 최근에 설계한 건물부터 찍고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찍었어요. 마산에 있는 건물들은 지나가다 오래 전에 설계한 건물을 우연히 발견하는 경우도 있었고,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나 직원들이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경우도 있었요. 사진을 찍으면서 당시 건축 작업할 때 있었던 기억들도 많이 떠올리게 되었지요. 사진을 활영하면서 "그 때 내가 좀 유치한 저런 설계를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죠. 기억을 더듬어 가며 작업하는 시간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었어요.
이윤기: 그럼 기억에 의존해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책에 다 안 들어갈 수도 있었겠네예?
신삼호: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아요. 많지는 않은데 대신......책을 만들 때는 전제조건이 있었어요. 무조건 다 싣는 것이 아니라 '당초 설계한 원형이 크게 훼손되거나 변형된거는 안 싣는다' 하는 기준을 세웠어요. 완전 리모델링 된 건물은 내가 설계했다고 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어요. 그렇게 뺄거 빼고 몇 군데는 놓친 경우도 있고 해서 133 곳을 책에 담았어요.
이윤기: 가장 애착이 가신다고 할까, 잘된 것 같다하는 작품은?
신삼호: 창원 YMCA 건물이 나한테는 설계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분명해요. 친환경 건축을 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좋은 건축주(전점석 사무총장)가 건축가를 트레이닝 시킨 그런 사례지요. 전 사무총장님이 큰 방향성을 가지고 '함께 해봅시다' 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어요. 전폭적으로 건축주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추구하는 친환경 건축의 방향을 지켜가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설계가 1차 완성되고 나서 고치자고 하면 수용하기 어려운데 그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어요. 창원YMCA 회관을 설계하면서 일본의 친환경 건축사례도 공부하고, 외국 사례도 공부하고 번역해서 블로그에 연재도 하고 그랬지요.
당시에는 친환경 건축가로 소문도 나고 여수YMCA 가사리 생태관 건축 자문요청도 받고 그랬어요. 창원Y 회관으로 창원 건축 대상도 받고, 경남 건축상도 받게 되면서 저를 알리는 역할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친환경 건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그 뒤에 연작으로 양산 국유림관리소, 왜관 산림조합 건물도 설계하였어요.
YMCA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가 좋아하는 <건축 탐구 집>을 자주 보시는지 물어봤는데, 출연하시는 분들이 스타건축가들이기도 하고, 유익한 공부가 되는 건물도 있기 때문에 자주 보신다고 하시더군요. 약간 연예인 같은 모습이나 간혹 원래 취지에 안 맞게 지나치게 화려한 건물이 나올 때도 있지만 보통은 아주 재밌게 보는 프로그램이라고 하였습니다.
민주시민대학에 참가한 것이 YMCA 활동의 시작
이윤기: 이제 YMCA와 관련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마산YMCA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신삼호: 1989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마산YMCA 시민대학에 참가하면서 YMCA 활동을 시작했어요. 서진건축에서 막 새로 일을 시작하였을 때인데, 소장이신 허정도 전 이사장님이 시민대학 참가를 권유해서 참여하게 되었지요. 저 말고도 오공환 축사, 조용범 건축사, 이문우 건축사 등 여러 건축계 후배들이 함께 시민대학에 참가했지요.
한지선 간사: 그 당시 시민대학이 어떤 내용인 거예요?
이윤기: 지금으로 치면 촛불 대학인데 10~12강좌로 역사, 철학, 문화, 정치, 경제, 통일 등 각 분야의 전국적인 스타강사를 초청하여 진행하는 시민강좌였어요. 87년 6월 항쟁 이후 새롭게 열린 민주화의 열기를 담아 낼 수 있는 사무직, 전문직 모임을 만들기 위한 강좌로 기획했어요. 요즘 아침논단이나 시민논단 같은 강좌를 매주 2~3씩, 4~6주 정도 몰아서 진행했다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신삼호: 처음부터 시민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회사 대표께서 참석하라고 권유하니까 안 가는 것이 쉽지 않기도 했고(웃음), 건축 외적인 사회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전혀YMCA하고 연관이 없었는데 시민대학이 계기가 되었지요. 당시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 <어머니> 같은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시민대학을 마치고 <민주시민회 디딤돌>이라는 모임이 결성되어 회장도 맡았고 3~4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한정현 이사, 이희동, 우진호, 김순애, 우정욱, 최상철, 성순난 이런 분들이 회원이었어요. 제가 모임을 열심히 할 수 없었던 것은 91년부터 건축사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92년에 시험을 치려고 준비를 했기 때문에 서울에 가서 학원도 다니고 사무실 이외의 다른 일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지요. 건축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다시 활동에 참여했지만 모임이 와해되었어요. 또 저는 93년에 서진건축에서 독립해서 사무실을 내면서 사무실 운영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구요.
이윤기: 네 시민대학도 4기까지 진행하고 더 이상 모집이 안 되어 중단 되었구요. 디딤돌 모임도 초기에는 뜨겁게 만났지만 3~4년 후에는 한 두 명씩 회원들이 빠지면서 흐지부지 되었던것 같습니다. 회원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왕성하게 일해야 되는 삼십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활동을 지속하는데 한계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지금 위원회처럼 조금 느슨하게 했으면 좀 더 오래 갔을지도 모르는데 활동가들의 기대치가 높았던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신삼호: 디딤돌 활동을 중단하고도 YMCA 하고 인연은 지속되었는데, 윤경태 당시 사무총장이 시민중계실 위원으로 활동하도록 권유했지요. 건축 사무소 운영에 매달릴 때였지만, YMCA 활동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위원회에 참여시키고, YMCA 활동이 비교적 가벼운 감사도 맡겼던 것 같아요.
이윤기: 네 부이사장님께서는 별로 열심히 안 하셨다고 하는데 당시 사진이 남아 있어서 열심히 하신 걸로 인정될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인연은 아기스포츠단 학부형이시죠?
신삼호: 96년 쯤에 딸 예진이가 아기스포츠단에 입단을 했지요. YMCA에서 다른 회원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예진이가 아기스포츠단에 다니고 초등학교 때도 YMCA 어린이 사회교육 프로그램과 캠프에 꾸준히 참가했기 때문에 한 10년 정도는 학부모로 마산YMCA 활동에 인연을 이어갔던 것 같아요. 또래였던 윤경태 사무총장과의 인연도 지속되었구요.
이윤기: 예진이가 아기스포츠단에 다니게 한 건 잘 했다고 평가하십니까? 사모님도?
신삼호: 아내와 맞벌이 하느라고 아이를 제대로 못 챙기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YMCA에서 하는 캠프 같은 곳에 빠지지 않고 다 참가했어요. YMCA를 통해 체득된 것이 자립심이 생겼다고 봐요. 혼자서 객지 생활을 한다거나 이런데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요.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할까.
이윤기: 이사회, 위원회 활동은 안 하셨지만 매년 회원 가입도 하시고 후원도 해주시면서 마산YMCA와 인연은 지속하셨던 것 같습니다.
한지선: 네 저는 이사님을 뵌지가 얼마 안 된 느낌이었어요.
신삼호: 그렇지요. 다시 이사회에서 활동한 것은 2019년이에요. 에제 5년차 정도 되었지요. YMCA 이사님들 하고는 지역사회에서 알고 지내는 분들이많았지만 육십이 다 되어서 다시 YMCA 활동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요.
이윤기: 새롭게 복귀하고 나서 다시 마산YMCA 활동을 하시면서 느끼시는 소감은?
신삼호: 박영민 이사장님이나 이런 분들 꾸준히 YMCA 활동을 해오신 분들을 보면 30대 중반까지 하다가 물러나서 거리를 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지요. 좀 그런 마음은 있어요. 그래서 이제 나이 들어서(육십이 다 되어) 다시 들어오는 것도 모양이 좀 그렇지 않나 싶어서 고민도 있었고, 좀 미안한 마음 같은 것도 있었어요.
이윤기: 그럼 더 더욱 정년까지 열심히 하셔야 되겠네예. 마지막 질문입니다. 인터뷰하는 모든 분들에게 질문하는 겁니다.
나에게 YMCA는 OOO이다?
신삼호: 이런 질문은 미리 귀뜀을 해줘야하는데....<나에게 YMCA는 신호등이다.> YMCA라는 신호등은 나를 나아가게도 하고 때론 쉬면서 관찰할 기회를 주기도 하는 곳이다.
한지선: 아까 말씀 드렸듯이 예전에 활동하신 거는 제가 얼핏 들었는데 직접적으로 마주한 뵌 지가 오래 되지는 않아 어색했는데, 이번에 몽골 가서 이사님을 더 가까이 좀 뵙고 얘기를 하게 되서 참 좋았어요.
이윤기: 자 그럼 오늘 인터뷰는 여기까지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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