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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YMCA/만나러갑니다

내가 애들 키울테니...너 울산 가라

by 이윤기 2023. 2. 23.

이선애 위원과의 인터뷰는 2월 9일 오후 3시, 함안군 가야읍에 있는 <가야어울림센터> 3층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저와 박미선 팀장이 함께 하였는데요. 2023년 야심찬 활동 계획을 세우고 있는 평생교육위원회 이선애 위원을 만났습니다.

이선애 위원은 마산이 고향이시고,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마산에서 다닌 토박이입니다. 무학산 아래 교원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울산에서 5년을 지낸 기간을 빼고는 늘 마산사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창원이라는 낯선 도시 이름보다 ‘마산’이라는 지명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선애 위원께서는 16년째 YMCA 활동을 하고 있다는 등대 촛불 김소진(공주) 회원의 인터뷰를 보고 “내가 YMCA 활동 경력이 짧아서 내세울 만한 활동 성과가 없다”며 걱정을 하셨습니다만,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자 평생교육과 문해교육에 관한 평소 생각을 폭포수처럼 쏟아내셨습니다. 


이윤기: 위원님께서 YMCA 늪에 빠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저는 개인적으로 YMCA를 ‘늪’이라고 표현합니다. 우연히 YMCA 늪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회원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선애: 안 그래도 인터뷰 오신다고 해서 언제부터 활동을 시작했는지 생각해봤는데, 정확한 시기가 기억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분명했던 건 옛 양덕동 회관에서 허정도 전 이사장님께 “도시는 삶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YMCA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평소에 막연하게 갈구했던 부분이 시원하게 해소되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또 다른 계기는 역시 김서현 센터장님 덕분이죠. 평생교육위원회가 만들어지기 전에 저와 김서현 센터장님과 전달래 선생님 이렇게 셋이 공부 모임을 먼저 시작했어요. 셋이서 공부모임을 하다가 김서현 센터장님이 YMCA안에 평생교육위원회를 만들어서 함께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고......위원회로 확대된 거지요. 

이윤기: 그럼 평생교육위원회의 씨앗은 이선애, 전달래, 김서현 이렇게 세 분이셨네요. 

이선애: 네 제가 방송통신대학 2000학번이구요. 전달래 위원이 2002학번이었어요. 제가 방송대에서 임원으로 활동하다보니 학번이 다른데도 전달래 위원과 인연이 되었고, 인생의 동반자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YMCA에서 역사탐험대 활동을 하시던 전달래 선생님을 통해서 김서현 센터장님과 만났구요.
사실 전달래 선생님이 네트워크의 달인이시거든요. 그리고 휴머니스트예요. 저 같은 경우는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 분명한데, 전달래 선생님을 사람을 다 좋아하는 스타일이시고, 사람들 연결도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시거든요. 비교하자면 저는 황무지를 개척하는 스타일인데, 전달래 선생님은 황무지를 개척하지만 야금야금 가랑비 옷 젓듯이 하는데 사람을 끌어안는 포용력이 있는 분이예요. 그러다보니 김경년 이사, 김정남 이사 이런 분들과 잘 연결이 된 겁니다.
방통대 다닐 때 제가 사무국장을 하면서 혁신적인 활동을 좀 했습니다. 회장들이 자비를 부담하던 전국 활동에 교통비를 지급한다던지, 방통대 전국 한마음대회에 연극반을 만들어 참가해서 1등을 하기도 했구요. 이런 활동을 하면서 평생교육위원회의 초기 멤버들과 인연을 맺었지요. 

평생교육위원회 씨앗 멤버인 이선애, 전달래, 김서현 세 분의 인연은 방송통신대에서 시작되었는데요. 이선애 위원이 방송통신대학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딸 넷 있는 집의 첫째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때 할머니 대소변을 받아낼 만큼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고 합니다. 과일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은 새벽 일찍 나가 밤늦게 귀가했기 때문에 여덟 식구 빨래하고 연탄 갈고 밥하고 설거지 하는 일은 모두 첫째 딸 몫이었다고 합니다. 
연년생으로 동생들이 태어나 함안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다는데, 외할머니께는 친손자, 손녀도 있었지만 이선애 위원과 가장 친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어르신 문해교육을에 남다른 애정을 쏟으시는 것도 외할머니와 마음이 잘 맞았던 추억이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 기억이 좋아서 지금 취미 생활 중 하나가 좋은 촌집을 찾는 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윤기 방송통신대 공부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이선애: 제가 맏이다보니 집안 일도 도 맡아 했고,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되었다. 그러다보니 상업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동생들은 아버지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인문계로 진학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삼성에 취업이 되었어요. 삼성에 취정ㅂ하고 월급도 많이 받는다고 아버지가 엄청 좋아하셨는데, 삼성이 워낙 일을 빡세게 시키다보니 대학을 갈 수가 없었어요. 다른 회사에 취직한 친구들은 대부준 야간대학에 진학하는데, 삼성전자 서비스 부서에 일하다보니 주말도 없고, 저녁도 없었어요. 삼성에 다닌다는 자부심은 있었는데 공부를 할 기회를 없었지요. 
그러다가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육아를 하면서 3년 정도를 보냈는데요. 자잘한 병치레 때문에 병원 다니고, 아이들 키우는데 올인하며 지내다보니 ‘나’ 라는 존재는 없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친구가 방통대에 입학한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큰 애 손 잡고 작은 애는 업고 다니며 방통대 공부를 시작했어요. 어느 가을 날 버스 정류장에 서서 4년 후 애 모습을 상상했는데... 어떤 모습도 그려지지 않더라구요.

 

단술장사, 신문배달, 방통대 진학...가만히 못 있는 성격?



이윤기: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키우는 동안은 완전히 공백기였나요?

이선애: 하하 제가 성격상 완전한 공백은 아니었습니다. 방통대 같이 입학했던 친구랑 아파트 상가에서 단술 장사를 했어요. 난생처음이었지만 둘이서 연구를 해서 단술을 만들었는데, 신화당 같은 것 넣지 않고 제대로 만들었더니 정말 잘 팔렸어요. 장사로 성공할 수 있었는데, 단술을 들고 회성동 삼거리에 팔러 갔다가 ‘무서운 아저씨들’ 만나는 바람에 30분 만에 되돌아 왔어요. 노점상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구요. 그리고 신문 배달도 했어요 이웃에 사는 동생이랑 같이 동네 아파트에 다이어트 삼아 신문을 배달했어요. 한 일주일 해보니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그럭저럭 1년 반을 하게 되었지요. 방통대 입학하면서 그만뒀어요. 방통대 공부가 은근히 빡새거든요. 신문배달하면서 공부해서는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만 뒀습니다.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했더니 성적이 나오더라구요. 좋은 성적을 받은 덕분에 3학년 때 대한주택공사에 기간제 사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지요. 다시 본격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방통대 처음 갈 때는 함께 다니는 언니랑 버스타고 가면서 “지금 공부해서 어디에 써 먹겠나” 하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는데...지금 잘 써먹고 있는 셈입니다. 

이윤기: 평생교육 전문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이선애: 제가 2000년에 방통대에 입학했구요. 2005년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평생학습 동아리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방송대 학생들 중에 공부 좀 열심히 한다는 학생들 8명을 모았지요. 모여서 같이 공부를 하다보니 관계가 깊어졌고, 처음에는 저 혼자 석사과정이었는데, 같이 활동하는 분들이 석사과정에 들어오고, 또 박사과정에도 들어가고 하면서 공부가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부산에서 부산울산경남 평생교육사협회가 만들어지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같이 공부하던 언니들하고 같이 여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경남에서는 저희들 밖에 참가하신 분들이 없었습니다. 이런 활동들을 하면서 제가 부산울산경남 평생교육사협회 부지부장도 맡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공부 모임을 하면 노란색 마티즈를 창원시외버스터미널에 주차시키고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서 버스를 타고 해운대까지 갑니다. 부산 회원들이 7시부터 모임을 하고 있으면 저는 8시쯤 도착해서 공부하고, 심야버스 타고 창원터미널에 와서 내서까지 다시 마티즈 타고 가는 빡센 일정을 해냈습니다. 


이렇게 협회 활동을 하면서 전국 학회나 모임에도 참여하게 되고 그러면서 ‘평생교육 현장 전문가가 되어야겠다’ 하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석사과정을 시작하고, 결국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된 겁니다. 사실 석사과정을 시작할 때 사회복지사인 남편도 학위 공부를 해야 하는 사정이었어요. 남편은 인제대학교, 저는 경남대학교 일주일에 이틀씩 번갈아 학교를 다녔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2학년 하고 여섯 살 때였는데, 아는 식당에서 저녁밥을 배달해주면 저녁을 먹고, 엄마, 아빠가 올 때까지 둘이 있었어요. 아이들도 힘들었고 저희도 힘들었고, 금전적으로도 힘들었지요. 금반지 다 팔고, 현금 서비스까지 받으면서 정말 어렵게 공부했습니다.(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울산시 공무원, 합격하고나니 욕심 생겨...5년 간 주말부부


이윤기: 함안에 오시기 전, 울산시 근무는 어떻게 해서 하게 되었습니까?

이선애: 울산 북구청에서 평생교육사를 뽑는다는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울산까지 간다는게 엄두가 안 났기 때문에 울산에 사는 제가 아는 선생님께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선애 샘은 (서류)안 넣으면서 왜 나한테만 넣으라고 하세요? 샘이 지원하면 저도 지원할께요” 라고 하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서류를 같이 냈는데, 글쎄 제가 덜컥 합격된 겁니다. 그때까지 남편한테도 이야기를 안 했거든요. 
서류를 낼 때만 해도 거리도 너무 멀고 해서 별로 갈 마음이 없었는데, 제가 합격이 되고 나니까 욕심이 딱 생기는거예요. 더군다나 당시에 울산 북구청에서 처음으로 평생교육사를 6급으로 뽑았거든요. 전국적으로 계장급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남편한테 이야기 했어요. 합격하고 나서 이야기 한거지요. 남편이 아무말도 안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 어떡하지 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내가 애들 키울테니까 너 울산 가라”이러더라구요. 그래서 2주 남겨놓고 울산 가서 원룸도 구하고 해서 5년 동안 주말부부로 지낸 겁니다. 2010년에 1월에가서 2015년 1월에 돌아왔습니다.

이윤기: 울산에서 남다른 성과를 남기고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울산에서 일 하신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이선애: 제가 5년을 울산에서 근무할 때 같이 일하신 분이 통합진보당 출신 윤종오 구청장이신데요. 공무원 몇몇을 콕콕 찍어서 박원순 이사가 있는 희망제작소에 연수를 보내시더라구요. 가서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배워오라고 하셨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뿌리 활동 사례를 듣고 공부를 만히 했습니다. 그때 인상 깊었던 것이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을 프로젝터 회의를 할 때, 자기 팀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팀원과 함께 회의를 한다고 하더라구요. 희망제작소가 수원시 평생학습관을 위탁운영할 때 “누구나 학교”라는 멋진 이름을 만들엇는데, 여러 팀을 섞어서 하는 회의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구요. 국가평생교육원에서 감탄할 만큼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더라구요.

이윤기: 문해교육을 울산에서 하게 된 것도 윤종오 구청장의 영향이 있었습니까?

이선애: 네 제가 울산 북구에서 6개월 정도 일했을 때, 윤종오 구청장이 취임하셨어요. 어느 날 구청장님께 불려갔는데, 문해교육을 몇 군데서 하고 있는지 묻더라고예. 제가 당황해서 다 섯 군데 이름을 이야기했는데, 확실하게 대답을 못해서 부끄러워죽겠더라구예. 구청장님이 문해교육은 돈도 많이 안 드는데, 꼭 필요하고 효과도 좋으니 확대해보라고 하셨어요. 제가 경로당마다 다니면서 어르신들 만나고 다녔지요. 현장을 다니면서 이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구청장님의 신뢰를 받았던 것은 제가 그냥 한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서울에서 전문 강사를 초빙해서 강사양성과정을 먼저 열었는데, 이런 걸 지켜보시고 일을 제대로 한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그 무렵 제가 저희 구청에서 하는 마을공동체교육 강사로 박원순 이사장님을 모셨어요. 외부로 공개도 안 했는데, 부구청장님이 불러서 어떻게 해서 박원순 변호사가 오냐고 물으셨어요. 통장, 이장 200여분을 모시고 마을 공동체 성공 사례를 들으려고 한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랬더니 며칠 후에는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더라구예. “박원순씨가 언제 옵니까?” 제가 큰(?)일을 벌였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나중에 한나라당 의원들이 강사비 제대로 집행했는지까지 다 따지더라구예. 제가 딱 규정대로 드렸기 때문에 자신있게 자료를 낼 수 있었습니다. 아무 소리 안 하더라구요.

박원순 시장도 인정한 스토커 공무원?


이윤기: 또 다른 에피소드는 없나요?

이선애: 제가 ‘스토커 공무원’이 된 사연이 있습니다. 저희 울산 북구 강의를 하기 전에 박원순 이사가 마산에서 먼저 강의를 했습니다. 창동에서도 하고, 하나로 마트 문화센터에서도 강의를 두 번 다 가서 들었어요. 어떤 강의를 할지 알았지만 제가 가서 듣고 저희 부구청장님께도 어떤 강의를 하시더라 하는 걸 미리 말씀을 드렸지요. 그리고 며칠 후에 저희 북구에 강의를 오셨는데, 제가 레이저 포인트를 갔다드리는데, 저를 딱 잡더니 사람들 다 있는 데서 하는 이야기가, “나를 스토커처럼 따라 다니는 공무원 처음 봤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예. 


이윤기: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나요?

이선애: 그 이후에 이제 구청장님이 박원순 이사님이 하는 희망제작소의 공정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하셨어요. 스웨덴하고 덴마크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 연수를 7박 8일 가는데, 구청장님을 모시고 가게 되었습니다. 김영배 성북구 구청장님, 김영종 종로구 구청장님, 인천에서도 오셨고, 서대문구 문석진 구청장님 그런 분들하고 함께 7박 8일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윤기: 자 그럼 함안에서 일하신 건 언제부터인가요?

이선애: 울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2015년 1월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잠깐 쉬다가 2016년 5월에 함안군에 임기제 공무원으로 다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울산에서 일할 때는 6급이었는데, 함안군에 올 때는 9급으로 왔습니다. 급수를 많이 낮춰 일하게 되었지만, 소신을 가지고 제가 가진 전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나름 열심히 하다보니 제가 하던 일의 직급이 9급으로는 맞지 않다고 해서 7급으로 다시 뽑았는데, 제가 응시해서 합격하고, 9급직은 퇴사를 하였습니다. 2021년에 7급으로 다시 임용되었지요. 

울산과 함안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게 된 이선애 위원의 파란만장한 이력을 듣고 나서야 YMCA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이윤기: 평생교육전문가로서 YMCA 활동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YMCA 활동의 많은 부분이 사실은 평생교육인데요?

이선애: 마산YMCA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심축은 본관 건물에서 일하는 실무자들, 그리고 실무자를 둘러싸고 있는 회원들이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회원의 날 행사 때, 여러 위원회 위원들과 회원조직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자발적인 참여자들을 보면서 놀라기도 했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회원활동위원회에 제가 평생교육위원회를 대표해서 참여하면서 압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각 모임마다 우리는 어떤 활동을 했다, 우리는 어떤 활동을 했다하고 보고를 하는데, 우리 위원회는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위축되어 가는데, 다른 모임들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제가 속한 평생교육위원회는 조금 정체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서현 센터장님이 본관에 계실 때는 공모사업도 하고 해서 어느 정도 활성화 되었는데,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활동이 좀 위축되었다고 할까요? 안개처럼 흐리고 불투명한 느낌 그런게 있었습니다. 아직 방향을 제대로 못 잡고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제가 소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습니다. 지금은 저희 평생교육위원회가 문해교육을 중심으로 일감을 찾고 현장에서 실행해보자는 결의를 해나가는 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김정남 위원장님과 제가 이미 경험을 축적하고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시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마산YMCA 활동이 취약한 대상이 어르신, 노인들인데요. 저희 위원회가 어르신들과 새로운 활동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여러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마산회원구에서 성공 사례를 만들면 장기적으로 농어촌지역으로는 찾아가는 교육도 시도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또 경험이 쌓이면 초등 학력이나 중등 학력을 인정받는 그런 학교까지 확장시킬 수도 있을거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이런 제안을 하고 위원들과 토론하고 추진해볼 생각입니다.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평생교육위원회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사회복지계와 평생교육계를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평생교육사들이 제대로 인정을 못받고 있고, 일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함안군에서 일하는 700여명 공무원 중에 평생교육사는 이선애 위원 딱 한 명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회복지사 숫자와 비교 자체가 힘든 숫자라는 이야깁니다. 역량강화교육이라던지 연수 기회라던지 이런 것도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누었습니다. 평생교육현장 활동가를 위한 역량강화 프로그램 같은 것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도 나누었네요. 

이선애: 평생교육위원회는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 목표입니다. 해외를 가던, 제주도를 가던, 1박 2일 연수도 생각하고 있고, 당장 3월에는 함안 투어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역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 활동을 구체화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윤기: 인터뷰 때마다 다 하는 상투적인 질문 하나 드릴께예. 나에게 YMCA란?

이선애: 저에게 YMCA는 <친구>입니다. 가끔씩 만나도 편하고 친한 친구, 친구이지만 도전도 주고, 자극도 주고, 편안함도 주는 그런 친구입니다. 처음 만날 때 서먹서먹 했던 평생교육위원님들도 만나면 만날수록 좋은 분들이라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저희 위원님들이 가진 역량을 모으면 지금 계획하고 있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결혼과 육아로 단절되었던 이선애 위원의 삶이 새롭게 꽃핀 것은 방통대부터 시작된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울산 북구청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활짝 꽃피웠던 것 같습니다. 특히 "내가 애들 키울테니...너 울산 가라"고 하신 남편(내서복지관 관장)분의 내조가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손자, 손녀의 육아를 도와주신 친정 부모님들의 지지와 지원도 있었구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한 것 처럼, 유능한 전문직 공무원, 평생교육전문가의 탄생을 위해 온 가족의 협력과 지지가 있었더군요.

 

인터뷰를 하면서 마산YMCA 평생교육위원회가 뭔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내내 함안군 자랑도 많이 해주셨는데, 지면 관계로 다 싣지 못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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