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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YMCA/만나러갑니다

이사 그만둬도...인생 끝까지 Y회원

by 이윤기 2023. 4. 3.

 

벚꽃이 활짝 핀 30일(금) 오전 회관 평화방에서 박수연 이사님을 인터뷰하였습니다. 박수연 이사는 지난 3월 정기이사회에서 마산YMCA 77년 역사 이래 최초의 여성 명예이사로 추대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마산YMCA 명예이사로 추대되신 분은 서익수, 최행진, 강현영, 허정도, 김휘안, 김인성, 김종수, 박수연 이사까지 모두 여덟 분밖에 없습니다. 

박수연 이사는 1995년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으로 마산YMCA에 입회하여 28년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5년부터 2023년까지 18년 간 이사로 봉사하시고, 명예 이사가 되셨습니다. 이사 정년이 3년 남았지만, 저녁 시간 요가 수업과 겹쳐 이사회 출석을 제대로 못하는 것 때문에 자진하여 퇴임하였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먼저 여쭤보았습니다. 

 

이윤기: 이사님, 어린 시절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박수연: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복한 가정이 아니었구요. 2남 3년 중에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큰 언니하고는 스무 살도 훨씬 넘게 차이가 났어요. 막내인 저를 마흔이 넘어 낳으셨어요. 나이는 많았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따뜻하고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국민학생들도 집안 일을 많이 하고, 농사도 많이 거들었는데, 부모님이 일을 많이 안 시켰어요. 나름 막내딸을 귀하게 대해주셨지요. 

그렇지만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친구들이 중학교 졸업하고 대부분 공장(마산수출자유지역)으로 가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어머니와 언니, 오빠들이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있도록 해줬어요. 시험 쳐서 떨어졌으면 재수까지 해서 고등학교에 진학 할 형편은 아니었는데, 부산에 시험쳐 합격하는 바람에 큰오빠가 있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큰 회사 경리담당자가 하청업체나 거래처에 결제를 해주면 ‘촌지’를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촌지를 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리를 피했던 기억도 있고 그런데......아무튼 알뜰하게 살았기 때문에 회사다니며 모은 돈으로 결혼 비용을 충분히 할 만큼 저축을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결혼하고도 회사를 다녔겠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결혼하면 99%는 회사를 그만둬야 하던 시절이었잖아요. 결혼 전에 회사를 그만 뒀지요

이윤기: 남편분하고는 초등학교 동기라고 들었습니다?

박수연: 네 남편은 초등학교 동기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휴대폰도 없었고 전화도 귀한 시절이라서 초등학교 친구들하고 펜팔을 많이 했습니다. 남편도 그런 친구 중의 하나였습니다. 시댁은 아버님이 교사였고 집안 형편도 우리보다 훨씬 좋았고, 그 시절에 남편은 대학도 나왔거든요. 그러다보니 친구로 지내기는 했어도 조건을 따져보면 결혼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었지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웠답니다. 

당연히 시댁에서 결혼을 반대했지요. 그렇지만 우리 남편이 고집도 있고 결혼하겠다고 막 드러누워버리니까 결국 어머님이 손을 들었어요. 몇 개월 반대하고 어머님이 딱 포기하셨어요. 포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안 해줬지만, 당시에 모아놓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내 돈으로 서울가서 신혼집도 구하고 살림도 장만하고 다 했어요. 남편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보니 서울서 직장생활 하면서 갈등도 많았고, 오래 있지 못하고 마산으로 다시 내려왔어요. 아무튼 결혼할 때는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시어머니가 저를 엄청 좋아하셨어요

이윤기: YMCA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박수연: 결혼하고 아이들 키우다가 아이들이 여섯, 일곱 살 쯤되니까 뭔가 하고 싶은 일은 있지만 아직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서 일을 시작할 형편은 아니었지요. 그 무렵 춘석(큰 아들)이가 YMCA 수영교실에 다니고 있었는데, 전단지를 하나 들고 왔는데 ‘소비자 교육’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너무 반가워서 YMCA 교육에 참가했지요. 제가 7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도 동아리 모집할 때보면 YMCA, 적십자 이런 단체들이 있었어요.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약자를 위해서 활동하는 단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열심히 참여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YMCA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 엄청난 행운이었어요. 지나고 생각해보면...... 제가 만약 동네에서 관변단체 같은 곳에 첫 발을 디뎠으면 아마 거기가 세상 전부인줄 알고 그 활동만 하지 않았겠습니까. 여기 와서 생각도 많이 변하고 그랬죠.

 

결혼, 출산, 육아 이후 인생 2막의 시작은 YMCA 시민중계실

 

이윤기: YMCA에서 당시에 만났던 사람 중에서 기억에 남는 분은?

박수연: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은 손영자 전 이사님이지요? 그때 시민중계실 상담원 회장을 하고 있었어요. 그 외에는 저희 기수들이 기억에 남는데요. 윤영란 선생님, 최상실 선생님, 손춘옥 선생님, 임영희 선생님, 김영숙 선생님 이런 분들이 동기였습니다. 사무총장님도 아시겠지만 다들 쟁쟁한 분들입니다. 상담도 열심히 했고, 다를 오랫동안 봉사했고 그리고 상담도 정말 잘했던 분들입니다. 당시에 손영자 선생님이 새로 온 우리가 시민중계실에 잘 적응하고 똘똘 뭉쳐서 재미있게 활동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월례회 하면 집에서도 모이고 그랬는데, 집에서 모일 때는 Y회관에서 못나눈 개인적인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더라구요. 서로 살아 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이해가 깊어졌고, 시민중계실 활동도 더 재미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손영자 회장님이 상담원들이 정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스게 소리도 많이해주셨는데, 저희들에게 시민중계실이 재미있는 모임이 되도록 이끌어주셨어요. 모임 마치고 집에 가면 남편이 오늘 들은 새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만큼 활기가 넘쳤습니다. 지금은 자주는 못 만나지만 지금도 큰 일 있으면 함께 만나서 위로도 하고 축하도 해주는 분들입니다. 

저희 동기 중에는 윤영란, 손춘옥 선생님, 그리고 동기는 아니지만, 가까이 살고 있는 한 기수 아래의 김필숙 선생님 그리고 조정순 선생님 이런 분들은 지금도 자주 만납니다. 오랜 세월 지나면서 마음이 통하는 다섯 명이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친구처럼 지내는 분들입니다. 

 

 

자타 인정, 시민중계실 최고의 기수 - 박수연, 윤영란, 손춘옥, 최상실, 임영희, 김영숙 

 

박수연 이사님 동기분들은 정말 쟁쟁한 분들입니다. 최상실, 임영희 선생님은 상담원 회장을 지내셨고, 상담 봉사활동으로 장관상을 수상하신 분들입니다. 손춘옥 선생님, 윤영란 선생님도 시민중계실 30년 역사에 기억될 만큼 양적으로 질적으로 탁월하게 상담활동을 하셨던 분들입니다. 돌이켜보면 마산YMCA 시민중계실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자원상담원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이윤기: 시민중계실 활동하시면서 상도 여러 번 받으셨지요?

박수연: 네 상담을 열심히 해서 당시 황철곤 마산시장님께 상을 받았습니다. 저하고 YWCA 사무총장님이 같이 상을 받았지요. 그리고 시민중계실에서 농산물 감시활동을 했는데요. 제가 여러 해 동안 꾸준하고 성실하게 활동해서 ‘농림부장관상’도 받았습니다.

시민중계실 상담하면서 보람 있었던 기억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보니 그 때 해결해줬던 그런 일들이 생각이 나지는 않는데, 할부판매, 방문판매로 피해 보신 분들 많이 도와줬습니다. 그 때는 그런 상담이 정말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YMCA에서 세입자보호조례 만드는 활동을 해서 큰 성과가 있었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강재현 변호사님, 김종대의원님하고 조례 만들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전국 뉴스에도 나오고 그랬어니까예

그리고 삼성생명하고 싸웠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삼성생명 상담을 제가 처음으로 받았는데, 소비자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명 부당한 일인데 이렇게 큰 보험회사를 상대로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요. 그런데 결국은 회사쪽 과실을 찾아내서 만기환급금을 받아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피해자 한 명당 800~900만원씩 되는 환급금이었기 때문에 전체 피해규모도 엄청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신용카드 불법복제사건도 기억이납니다. YMCA 시민중계실에서 신용카드가 복사가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친구나 가족들 부탁으로 카드 만들어서 아무 곳에나 두면 안 된다하는 것도 알았지요. 분실 신고만 하면 카드사가 다 책임진다는 말이 거짓인 것도 그 때 알았구요. 마침 그 무렵에 마산 신포동에서 신용카드 복제사건이 일어나서 상담을 많이 받았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이윤기: 남편분은 YMCA 시민중계실에서 10년 넘게 봉사하고, 그 뒤에 또 이사로, 위원으로 봉사해 온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박수연: (하하)남편은 정치적으로는 좀 보수적이에요. 그렇지만 제가 YMCA 활동하는 것은 늘 적극지지해줬어요. 시민중계실 봉사할 때도 응원해줬고, 제가 요가 강사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저녁시간에 수업이 많아서 5~6년 전에도 그만두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반대했어요. 중간에 그만두지 말고 정년까지 봉사하라고...... 중간에 정년이 늘어나서 제가 68세까지는 못하고 65세에 이사를 그만두게 된 겁니다.

사실 이번에도 남편은 약간 말렸어요. 그렇지만 제가 출석을 제대로 못하면서 이사회에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싶어 결단을 한 겁니다. 제가 이사회에 안 나와도 기진맥진 활동에도 늘 참여하고 있고, YMCA 크고 작은 행사에도 다 참여하고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늘 YMCA에 있기 때문에 나이가 더 들어도 Y 회원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할 겁니다.

 

꼬박꼬박 월급 잘 나오는 마산시청 그만둔 까닭?

 

 

이윤기: YMCA 시민중계실 활동도 정말 잘 하셨고, 경남도청과 마산시청에서 파견상담원으로도 역량을 인정 받으셨는데... 왜 그만두셨나요?

박수연: 도청 소비생활센터에서는 상담이 많아서 힘들기도 했지만 또 상담이 많아서 보람도 있고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산시로 오니까 상담이 별로 없고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가려니 굉장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일 없이 월급 받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어요. 세금으로 하는 일인데 이렇게 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던차에 제가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도청 파견상담원으로 일 할 때 정시에 퇴근하면 시간이 넉넉해서 취미 삼아 요가를 시작했는데, 제가 요가의 매력에 푹 빠져 버린겁니다. 제가 원래 스포츠댄스를 했기 때문에 요가는 운동도 아니다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마침 마산시청으로 옮기면서 요가학원에 등록을 했는데, 훌륭한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요가를 제대로 하려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산대학 재활학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제가 대학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드디어 공부할 기회가 왔던겁니다. 마산대학 졸업하고 원광디지털대학 요가학과에 편입해서 졸업하고, 또 거기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나중에 인도로 요가지도자 연수도 다녀왔습니다. 

 

2년 동안 국가자격증 5개 획득, 수석 졸업에 총장상까지...

 

지금에야 하는 이야기지만 그 때 제가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아들하고 같이 대학에 입학했는데, 마산대학 2년 다니는 동안 제가 국가자격증을 다섯 개 땄습니다. 요가를 제대로 가르치려면 필요하겠다 싶어 야간에 간호학원을 다니면서 간호조무사 자격도 땄구요. 피부관리, 사회복지, 생활체육지도자(요가), 헬스트레이너 자격을 다 땄습니다. 피부관리사가 제일 어려웠어요. 세 번 떨어지고 네 번째에 합격했거든요. 마산대학 다니는 2년 동안에 국가자격증 다섯 개를 땄구요. 최근에는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생각으로 지인과 함께 요양보호사 자격도 땄습니다.

마산대학을 졸업할 때, 제가 젊은 친구들 다 제끼고 수석 졸업도 했고, 졸업생을 대표해서 총장상도 탔습니다. 교수님들이 2년 만에 국가자격증 다섯 개를 딴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고 하시더라구요. 나중에 마산대학에서 강사로 교수로 강의를 하게 된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윤기: YMCA 활동하면서 보람 있었던 때는?

박수연: 제가 친구들이나 가족들 한테는 YMCA 활동하는 표시를 별로 안 내는데, 역시 저를 가장 인정해주는 쪽은 가족들 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엄마가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을 좋게 생각해주고, 남편도 YMCA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해줬습니다. 가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뿌듯했던 것 같습니다. 

 

시민중계실에서 상담봉사 할 때 보람 있었던 일이 많았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니 기억이 잘 안나네요. 시민중계실에서 10년 넘게 자원상담원으로 활동하면서 했던 경험이 나중에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시민중계실에서 매일매일 힘들게 활동하면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이윤기: 앞으로 마산YMCA 활동을 위해서 제안하실 말씀은?

 

박수연: 마산YMCA가 지역사회에서 자기 몫을 잘 해왔다고 저는 생각해요. 요즘들어 나이드신 분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령사회로 가고 있는데, 퇴직 이후에 YMCA를 통해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노인정 같은 것도 필요하고, 주간보호센터 같은 것도 YMCA가 제대로 운영하는 사례를 만들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 위원회나 클럽, 동아리에서 그 멤버들끼리 잘 지내도록 하는 것이 결국 YMCA 역량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YMCA 30년 활동의 베프는 조정순 이사

 


이윤기: 이사님의 YMCA 베스트프랜드는 누구입니까? 

 

박수연: 누구누구 해도 역시 조정순 선생님이죠. 제가 YMCA 활동하면서 정말 좋은 분들 많이 만나고 많이 배우고 했습니다만, 조정순 선생님과 함께 활동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조정순 이사님은 어떤 활동에도 성실하게 열심히 참여하는 분이고, 그리고 어떤 모임에서든지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분이잖아요. 

이윤기: 자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 가고 있습니다. 인터뷰하는 분들마다 다 물어보는 공통 질문입니다. “나에게 YMCA는 OOO이다?”

 

박수연: 나에게 YMCA는 ‘정신적인 기둥’이다. 혹은 나에게 YMCA는 ‘내 삶의 절반’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내 삶의 절반이 YMCA이기 때문에 이사를 그만둬도 (노년을) 끝까지 YMCA와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윤기: 질문에 없었지만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박수연: 제가 경제적인 능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큰 역할을 할 수는 없는 것이 늘 안타깝지만, YMCA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넉넉해졌으면 좋겠어요. 실무자들이 처우가 조금 더 나아지면 좋겠고, 사무총장님도 재정 걱정을 좀 덜 하고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1996년 무렵에 처음 YMCA에 왔을 때, 실무자들이 월급도 제때 못 받고 하던 시절하고 비교하면 엄청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YMCA가 조금 더 재정적으로 안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늘 그런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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