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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돋움] 혀꽃의 사랑법

by 오승민 2024. 4. 5.

 

 

혀꽃의 사랑법/ 정일근

추천: 김경년(마산YMCA 이사, 평생교육위원회 위원,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

 

혀꽃을 아시나요
40여 년 동안 오롯이 시를 써온 정일근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 ‘혀꽃의 사랑법을 추천합니다.

지난해 창동꽃길 벽면에 ‘바다가 보이는 교실1'을 옮겨 써놓으면서 골목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발걸음을 멈추게 하여 목소리를 울리며 읽어 드리는 행복을 느끼고 있답니다. 서너해 전, 창동 이웃동네로 이사 온 뒤로 빠바방 소리를 내며 전기 자동차를 타고 창동거리, 골목을 드나드는 일상을 즐기고 있으며 골목 속 커피가게에 손님들을 늘 모시고 와서 창동사랑을 나누는 창동오빠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잠을 잃고 새벽녘에 느리게 자전거를 타고 모두가 잠든 시간을 몇 바퀴 다니면서 발견하게 된 창동에 돌아다니는 행성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는 어린 왕자이기도 합니다.


혀꽃의 사랑법

  꽃은 언제나 비밀이 있어야 하지. 은밀히 그 비밀에 닿기 위해 나 역시 혀부터 쑥 내밀어보는 거야. 그런 혀를 꽃인 듯 내미는 두상꽃차례가 있어. 가령 당신이 사랑하는 만추의 하얀 구절초가 그래. 그 많은 순백의 긴 혀를 가진 혀꽃들이 꽃인 듯 내밀고 사랑을 유혹하지. 그 혀 깊은 곳에서 꽃은 노란 은유로 숨어 때를 기다리지. 혀와 혀의 뜨거운 시간이 지나면 은유는 저절로 열리는 꽃문이지. 꽃이라 믿었던 꽃은 혀꽃일 뿐, 내가 감춘 주제를 읽기 위해 비유부터 더듬어 오는 당신처럼 사랑이든 벌나비든 혀꽃을 향해 날아드는 거지. 그것이 열매 맺지 못하는 헛꽃이지만 슬픈 사랑은 아냐. 혀가 끝나는 곳에 내가 가진 가장 뜨겁고 단단한 바라밀波羅密이 숨어 당신 기다리고 있지. 수백의 혀를 둥글게 펼치며 지금 나는 고백 중이야. 사랑해. 사랑한다니까. 순간의 계절이 지나면 나는 사라질 것이니. 결국 당신 또한 사라질 것이지만.

 


 

바다가 보이는 교실 1
-우리반 내 아이들에게

너희들 속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구나
저 산에 들에 저절로 돋아나 한 세상을 이룬
유월 푸른 새 잎들처럼, 싱싱한
한 잎 한 잎의 무게로 햇살을 퉁기며
건강한 잎맥으로 돋아나는 길이 여기 있구나
때로는 명분뿐인 이 땅의 민주주의가,
때로는 내 혁명의 빛바랜 꿈이,
칠판에 이마를 기대고 흐느끼는
무명 교사의 삶과 사랑과 노래가
긴 회한의 그림자로 누우며 흔들릴 때마다
너희들은 나를 환히 비추는 거울,
나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창가에 서서
너희들 착한 눈망울 속을 조용히 들여다보노라면
점마다 고운 빛깔과 향기의 이름으로
거듭나는 별, 별들
저 신생의 별들이 살아 비출 우리나라가 보인다
내 아이들아, 너희들 모두의 이름을 불러 손잡으며
걷고 싶어라 첫새벽 맨발로 걷고 싶어라
너희들 속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
내가 걷고 걸어 가 닿아야 할 그 나라가 있구나

 



정일근 <1958. 7. 28.~>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졸업. 
1984년 『실천문학』 제5권에 신인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시부문 당선.
1986년 서울신문(현 대한매일)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시와 시학 젊은 시인 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포항국제동해문학상.
2013년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 특별상 등을 수상.  
‘시힘’과 ‘작은詩앗·채송화’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산골마을에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와 동시를 쓰며 경남대학교에서 시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방』, 『소금성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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