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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아서

by 조정림 2025. 7. 4.

마산YMCA 시민사업위원회, 광복 80주년 기념 중국 독립운동 기행

 

신삼호 (마산YMCA 이사장)

 

마산YMCA 시민사업위원회에서는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자취를 답사하면서 해방의 의미를 몸소 체험코자 하였습니다.  2025년 6월 4일부터 8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상해, 항주, 남경 세 지역을 답사하였으며, 본 글은 임시정부의 시작점인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이전하는 시기인 1932년 사이에 일어난 임시정부의 활동과 임시정부 청사 건축 및 역사적 장소들의 흔적들을 살펴보았습니다.

 

1.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상해는 중국의 관문 역할을 하던 개항도시였기에 프랑스를 비롯한 미국, 영국 등 열강들이 진출하여 각각 조계지를 갖고 있던 국제도시였다.  한인들이 중국으로 진출한 것은 19세기 말 개항 이후였으며 특히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또 국권을 되찾기 위한 활동무대를 찾아 대거 중국으로 이주한 곳이 상해였다. 그래서 이미 1910년을 전후하여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역 내에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한인들은 1911년 신해혁명 후부터 중국 혁명세력과 국제적 연대를 형성하는 한편, 독립운동 단체의 결성을 시도한 결과 1912년‘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운동단체가 결성된 것이 그 시초이다. ‘동제사’는 신해혁명에 참가하는 중국의 혁명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던 신규식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상해에 강습소 및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상해지역 독립운동이 기반 조성에 주력하였다. 이러던 중 국내에서 3.1운동이 폭발하고, 망명 정객들이 잇달아 몰려들자 프랑스 조계는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을 계기로 수립되었다. 3.1운동이 전개되던 3월과 4월에 국내에 각지에서 모두 8개의 정부조직이 선언되었으나,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노령, 상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세 곳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실현한 것은 1919년 9월이었다.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결정되었고, 임시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국무위원들로 정부를 구성했다.


임시정부 탄생 당시의 각료는 재무총장 최재형, 차장 이춘숙, 군무총장 이동휘, 차장 조성환, 내무총장 안창호 차장 신익희, 법무총장 이시영, 차장 남형우, 외부총장 김규직, 차장 현순, 교통총장 신석우, 차장 성우혁으로 구성되었다. 이미 1919년 4월 10일 국내외 지도자들이 모여 지역별 대의원을 뽑아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으며, 대의원수는 40명이었다. 모임의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하고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 서기 이광수, 백남칠을 선출한 다음 국호와 관제 등을 결의한 상태였다.

 

<사진1. 반세기의 증언, 조선일보 64.3.8>2.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1919~1932)

 

2.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1919~1932)

 

비록 망명 신세의 임시정부였지만 다양한 활동을 시도하였다.
첫째 국내로의 통치를 시도하였다.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부터 국내 행정을 직접 장악하기 위해 안창호가 주도한 행정과 정보의 연결망으로 연통부과 교통국을 설치하여 정보를 수집코자 하였다. 실제로 평안남북도, 함경도 등 북부지역에는 비빌리에 군수와 면장까지 임명했고, 행정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교통국은 각 지방의 연락 조직망으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연결시키는 기능 즉, 통신과 정보수집 및 전달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얼마 진행되지 못하였다.

 

두 번째는 다각적인 대외적인 외교 활동은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수립 4개월 전인 1918년 11월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2년 2월에 김규식을 파리로 보낸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파리대표부를 구성하고 전권대사로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의 의도를 달성할 수 없었다.  중국과의 외교활동은, 손문이 광동에서 합법정부를 수립하자, 1921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인  신규식이 손문을 방문하여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얻어냈다. 미국에 대해서는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국 의회와 정계에 외교활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세 번째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계획 수립과 활동이다. 군대 조직을 위한 법규를 마련하고, 간부양성과 모병 활동을 전개하여 만주지역의 독립군 조직을 통할, 지휘하는 세 가지 내용으로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919년 말에 말 상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군사간부 양성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육군무관학교는 1920년에 1기생 19명과 2기생 24명이 졸업하고 재정상 어려움으로 폐교되었다.한편 임시정부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과 연계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조직으로 편제되었으며, 서간도의 여러 독립단들을 통합하여 광복군총영을 조직했다.


네 번째는 교육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상해에 거주하는 교민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초등 과정의 ‘인성학교’와 중등과정의 ‘삼일학교’를 운영하여 민족혼을 고양시켜서 장차 독립운동자로 배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임시정부는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소식을 국내외에 전하고 동포사회가 있는 세계 각지로 배포되어 동포들의 힘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했다. 상해판 ‘독립신문’은 임시정부 기관지로 창간 당시 사장은 이광수이며, 1919년 8월 21 창간되어 1926년 11월 26일까지 7년에 걸쳐 발간하였다.

 

<사진2.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남경로 영운백화점, 1921. 1. 1>

 

3. 임시정부의 체제 개편 : 이승만의 탄핵과 개헌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될 때, 신채호가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립 직전에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을 위임 통치해 줄 것을 청원한 사실에 대하여 “없는 정부조차 팔아먹은 자”라고 하면서 극력 반대했고 결국 신채호는 북경으로 이동하여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반임시정부 활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직책 명칭을 미국에서 대통령이란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임시정부 각료들과 마찰이 지속되었으며, 임시 국무총리로서 상해에 머물지 않고 미국에서 활약한 것도 임시정부 침체 요인이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간 상해에 부임하였지만 갈등현상을 해결하지 못하고 하와이로 돌아가 버렸다.


 이러한 이승만의 망동으로 인해 임시정부는 1920년 말을 고비로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 국내의 지원도 일제 경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국내로부터의 지원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1925년 3월 이승만 임시 국무총리 이승만 탄핵시키고, 개헌을 통해 체제를 개편하기에 이른다. 이승만에 대한 탄핵의 원인은 미국에 위임통치론 요청한 것과 미국에서 체류하면서 원격 조정하는 업무태도와 재미 동포들의 인구세를 거둬 임시정부에 송금하지 않은 점등이다.


1925년 4월 2차 개헌을 단행하여 이승만의 독주 평가를 받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를 채택했다. 초대 국무령에는 만주 독립 운동계의 중심 인물인 이상룡이 추대되어 6개월 동안 혼란수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각에 실패하고, 이후 1926년 7월 후임으로 홍진이 취임했고, 이어서 김구가 국무령이 되면서 임시정부는 본격적인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다.

 

<사진3. 두 번째 임시정부청사. 상해시 하비로 460호>

4.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과 윤봉길의사 의거

상해 임시정부는 만주사변 발발(1931년 9월) 이후 국무회의를 열어 의열투쟁을 결정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다. 임시정부의 의열투쟁은 1932년 1월과 4월의 이봉창, 윤봉길에 의한 양대 의거로 나타났다.

 

김구는 미주교포들이 지원한 자금으로 이봉창을 일본 동경으로 파견하여 일왕의 행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심으로 상해에 주둔하던 일본 해군은 이를 핑계삼아 상해를 침공하였다. 일본은 상해의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 폭격함에 따라 중국은 일본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에 일본군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일왕 생일인 4월 29일 승전기념 행사를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하던 시기에 윤봉길이 던진 폭탄이 식단 단상을 박살 내었다. 


이 의거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민의 지지와 성원을 일으켰으며 침체된 독립운동계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 당시까지 임시정부를 원조하지 않던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김구가 장개석을 만나 중국사관학교에서 우리 청년을 교육시킬 수 있게 만듦으로써 군사력 양성의 길을 열게 된 것도 이 의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떠나야 했다. 일제 경찰이 프랑스 조계 당국을 협박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때 안창호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대부분의 요인들은 항주, 가흥 등지로 피신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주요 근거지인 상해를 떠나,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오랫동안 중국 대륙 각지로 이동하여 활동하여야 했다.

 

<사진4. 의거 직전의 윤봉길 의사>

 

5. 임시정부 공간의 흔적들: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짧게는 두 달에서부터 길게는 6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며 활동하였다. 자료에 따라서는 7번까지 청사를 이전해 다녔다고 하나,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서 활동하는 보안상의 문제로 세부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간 확인된 자료를 토대로 시기별로 살펴보니 4번 정도의 이전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첫 번째 임시정부 청사 : 서금 2로(瑞金二路/Ruijin Rd. No2)
첫 번째 임시정부가 있었던 건물 위치는 당시 가로명으로 ‘金神父路 22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역에 지난 1994년 지하철 공사 및 재개발로 인해 철거되었으며, 현재 가로명은 ‘서금 2로’로 변경되었으며 이 구간은 재개발되어 고층빌딩 가로로 변모하여 청사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대략 도로 구간을 확인 해보니 ‘서금 2로’는 남북 방향 가로구간 1.5Km정도이며 북측 시작점에는 ‘신화련대화서루(新华联大厦西楼 (Shanghai, Huangpu, 淮海中路775号)’가 자리하고 있으며, 남측에는 ‘日月光中心’ 건물을 사이에 난 도로이다. 첫 번째 청사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다음 이전 장소가 ‘회해중로(淮海中路)’ 일대임을 고려하면 ‘서금2로’와 교차점인 ‘신화련대하(新华联大厦)건물’ 입구에 임시정부청사 표지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5. 서금2로 북단의 ‘산화련대하’빌딩, 우측사진은 남단에 위치한 ‘일월광센터’ 건물>

 

2) 두 번째 임시정부 청사 : 회해중로(淮海中路) 651 
서금 2로 청사에서 동측으로 200미터 지점에 위치한 두 번째 청사건물은 1919년 8월부터 10월까지 사용했던 건물이다. 당시 건물위치는 가로명 ‘하비로 321호’이며 현재 유일하게 사진이 남아있는 청사이다. 

 

<사진6>을 통해 청사를 살펴보면 2층 적벽돌 건물로 외벽에 태극기를 내건 당당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당시 청사 건물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교민들의 성금으로 마련됐다. 하지만 이후 하비로에서만 두 번 더 청사 건물을 옮겨야 했다고 한다. 이유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야 했고, 내부 분란 때문에 우리 국민들로 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건물은 현대식으로 6층 규모의 의류매장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두 번째 청사로 위치가 확인되었기에임시정부 옛터 표지석 설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진6. 두 번째 임시정부청사. 상해시 하비로 460호, 우측 현재 건물 전경>

 

3) 세 번째 임시정부 청사 : 상해시 프랑스 조계지 모처
검색앱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상해임시정부 청사 이전’에 관한 뉴스를 발견하였다. 장소는 언급이 되어있지 않았지만 ‘기존 청사의 협소한 공간 사정을 해소하기 위해 더 큰 곳으로 옮겼다.’는 뉴스였다.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프랑스 조계지 내 모처에 위치한 신축 양옥건물로 1층에 주차장과 경호원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상층부에는 국무회원실과 비시설, 각부 총장실이 있는 매우 화려한 건물로 청사 전면에는 중한한 경찰관이 경계중인 건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보도 시기는 1924년 5월 25일자에 소개된 이전소식에서 건물 위치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기존 청사가 협소하여 큰 장소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조계지 모처라는 곳 외에는 위치에 대한 정보가 없으며, 사용기간도 이후 얼마간 이곳을 사용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1924년 5월에 이전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진7. ‘임시정청이전’ 기사, 조선일보 1924년 5월 25일>

 

4) 네 번째 임시정부 청사 : 마당로 보경리(普慶里) 4호 
현재까지 상하이에 온전히 남아있는 유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건물로서, 사용 시기는 1926년부터 입주해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인 1932년 4월 말까지 사용하였다.

 

마당로 청사는 1980년대 후반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상하이시는 1988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기 위한 공동조사를 진행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6년부터 1832년까지 자리했음을 확인했다. 이에 한중 양국은 복구작업을 벌이고, 1993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복구 완공기념식을 거행했다.

 

마당로 청사의 위치는 회하중로에서 동측으로 2Km 정도 거리에 있다. ‘회해중로 청사’가 간선도로에 면한 업주시설 위주의 가로인데 반해 ‘마당로 청사’는 도심의 ‘골목 연립주택’ 형식인 이농주택(里弄住宅)으로 이전한 것은 일본의 탄압아 심하여 피신의 용이성을 고려하여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 청사는 골목을 통해 세대별 진입하는 공동주택 양식인 ‘석고문 리농주택(石庫門里弄住宅)’에서 업무를 본 것이다. 임시이기는 하나 일개 국가의 청사가 단칸 3층 규모의 협소한 주택에서 광복의 그날을 기약하며 있었다고 하니 짠한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사진8. 골목이름 普慶里라고 적힌 골목 입구, 우측사진은 세대입구 석고문 전경>

 

5) 1921년 임시정부 신년 축하식 장소 : 南京路 永安백화점(남경로 65)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가 출범한 이후 해마다 1월 1일이면 신년 축하회를 가지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하였다고 한다. 1921년 년초에 촬영한 신년 축하회 사진이 남아있는데, 사진 속의 역사적 건물을 구글 지도를 통해 찾아보니 상해시 남경로 번화가에 원형을 유지한 채 잘 남아있었다.

 

그래서 <상해 근대도시와 건축> 책을 찾아보니, 상해의 근대기 건물 ‘영안공사대루(永安公司大樓)’로 소개되어 있었다. 1918년 건립되어 현재까지 영안백화점(永安百貨)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었다.건립 당시의 원형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상해근대건축물(上海市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된 건물이다. 

 

지상 6층 규모로 1층부터 4층까지 백화점이고, 옥상에는 루외루(樓外樓)인 천운루(天雲樓) 오락장을 개설하였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신년회 사진은 천운루 오락장에서 촬영한 사진임을 알 수 있었다.(사진10)

 

<사진9. 1921 임시정부 및 의정원 신년축하식 사진, 우측 사진 축하식이 벌어진 영안백화점 옥탑 사진>

 

영안백화점의 건축적 특징은 고전양식을 차용한 근대기 상업건물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입구에는 이오니아양식 기둥으로 장식하였고, 상층부에는 테라스를 설치하여 궁전의 이미지를 나타낸 건물이다.


외벽은 층별로 다른 기둥 양식을 장식하였으며, 우측벽 옥상에는 3층 높이의 탑루를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당시 가로변 사진(사진10)을 보면 건너편 백화점과 더불어 탑루의 장식을 경쟁하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역사적인 장소가 중국의 역사적 건축물로 남아있어서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옥상 탑루에서 정초에 상해임시정부를 기리는 행사라도 열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10. 1920년대 난징로 전경으로 촤측건물이 영안백화점, 우측사진은 현재의 영안백화점 전경>

 

6) 김구 선생 거주지 : 영경방(永慶坊) 10호
김구 선생 거주지는 마당로 청사에서 북측방향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거주지는 도심형 연립주택으로 골목길 이름은 영경갑(永慶坊)이며, 골목길 내 10호 주택이다. 김구 선생이 가족과 함께 1922년부터 1926년까지 생활했던 주택이라고 한다.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모친 곽낙원 여사와 아내 최준례 여사 아들 인과 신을 데리고 영경방 10호에서 거주한 곳이다. 

 

이 집과 관련 된 인물은 김가진 선생이다. 본래 이 집은 감가진 선생이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와 함께 살던 집이었으나, 1922년 김가진 선생이 돌아가신 뒤 아들 김의한이 김구 선생에게 넘겨 준 주택이다. 김가진 선생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제2의 독립만세 시위를 기획한 조선민족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후 임정과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하시다 1922년 이국땅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난 애국자이다. 김구 선생과 더불어 함께 기억해야할 분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주택 흔적은 골목 영경방 이름뿐이며, 10호 주택은 전문식당가로 바뀌어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사진11. 영경방 골목입구 전경, 우측사진 : 고급상가로 변모한 골목길>

 

이외에도 답사할 만한 역사적인 장소를 소개하자면 예관 신규식 선생이 사셨던 거주지 <상해 남창로 100농 5호>와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키기 전 김구 선생과 만난 장소 <원창리 13호. 김해산 선생의 집>도 잊혀서는 안 될 장소라고 생각한다.

* 참고서적
-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한울아카데미
- 임정로드 4000km. 김종훈 김해주 정교진 최한솔 지음. 필로소픽
- 상해 근대도시와 건축. 이안 지음. 도서출판 미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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