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숨은 공로자들 (1) : 상하이편
김태석(시민사업위원회 위원/ 역사와문화 회장/ 기록이사)
"마산YMCA 임정로드 연수기"
마산YMCA의 임정로드 연수를 출발하기 전, 개인적인 목표가 있었습니다. 김구,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등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임시정부 설립과 유지에 공로가 큰,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될 요인들의 행적을 찾아보겠다는 것. 하지만, 워낙 빠듯한 연수 일정 사이에 따로 시간을 내서 이들의 흔적은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또 중국의 재개발 열풍으로 곳곳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유적들이 사라지고 있어, 우리 같은 비전문가들이 찾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겠죠. 누군가 그 일을 해줄 것이라 믿고 우리가 주목하지 않은 인물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글은 <나는 대한민국 파수꾼입니다> (은동진, 2022, 초록비책공방), <임정로드 4000km> (김종훈 등, 2019, 필로소픽), <3.1혁명과 임시정부> (김삼웅, 2019, 두레>을 참고했습니다.
1) 김가진 (1846-1922)
김가진은 국내에서 여러 독립운동 활동을 하다가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본인이 총재를 맡던 조선민족대동단의 본부를 상하이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안창호화 접촉했습니다. 안창호도 농상공부 대신이자 중추원 의장이었던 김가진을 적극 반겼습니다. 1919년 10월 29일 상하이 임시정부에 도착한 김가진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나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 이간의 망명을 추진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 확보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의친왕의 망명은 일본 경찰에 적발돼 실패했습니다. 김가진은 또 1919년 12월 7일 상하이대한인거류민단이 주최한 시국 강연회를 맡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중심이 돼어야 하고, 교육을 통해 미래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가진은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활동하기 보다는 임시정부 경영 전반을 조언하는 고문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됐는데도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자, 박은식, 안창호 등과 함께 새로운 대통령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병마와 가난에 시달린 끝에 1922년 79세에 생을 마감했고, 임시정부는 사회장으로 엄숙하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김가진이 별세하자, 그의 집 영경방 10호는 김 구 가족에게 넘겨줬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임시정부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셋째 아들 김용한은 의열단 사건에 연루돼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고, 손자 김석동은 한국광복군에 가담했습니다.
2) 신규식 (1879-1922)
신규식은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 3-4번의 자결을 기도했습니다. 을사조약, 한일신협약, 경술국치에 항의해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1911년 3월 경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은 소수였습니다. 상하이가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 데는 신규식의 역할이 컸습니다. 우선 중국의 국부로 불리는 쑨원의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해 1911년 10월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우창혁명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혁명가 천치메이와 함께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한 신해혁명(1911)에 가담했습니다.
선생의 맞은 편 집에는 1921년 중국공산당을 창당한 주역이자 당 중앙서기에 선출된 천두슈 선생이 살고 있었습니다. 1913년에는 중국의 문학단체인 ‘남사’에 가입했습니다.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 박달학원을 개설해, 중국과 미국의 학교에 유학을 보내고 학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또한 신규식은 톄진군수학교, 난징해군학교, 윈난군수학교 등에 한국 청년들의 입학을 주선했습니다.
1912년 5월 20일 최초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했는데,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발기인 29명 중 14명이 동제사 출신입니다. 즉 동제사는 임시정부의 전신과도 같습니다. 1917년 7월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 14명이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한 ‘대동단결선언’을 선포했습니다. 1919년 4월 10일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고,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됐는데, 신규식의 이름은 신경쇠약증으로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이어서 빠졌습니다.
1919년 9월 11일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의, 상하이의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정부가 통합됐습니다.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한 것입니다. 신규식은 통합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으로 임명됐습니다.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이 상하이에 왔지만 갈등이 커지자, 이승만은 워싱턴으로 떠나면서, 신규식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해 수습을 맡겼습니다. 10일 후에는 외무총장직도 겸임하면서 임시정부에서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올랐습니다. 신규식은 얼마 후 쑨원을 만나, ‘호혜 조약 5관’을 전달하고 승인받음으로써, 임시정부가 일본에게서 독립된 정부라는 것을 인정받았습니다. 신규식은 국제회의에 독립 문제를 제기하고자 이승만을 워싱턴 회의에 보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책임을 지고 모든 직책에서 사퇴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본인의 역할이 끝났다고 보고 단식을 한 끝에 1922년 9월 25일 49세에 타국에서 세상을 등졌습니다.
3) 김익상 (1895-1943)
1920년 상하이로 톄진에서 상하이로 망명한 김익상은 프랑스 조계지인 ‘백이로 삼익리’에 거주하면서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1921년 그는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할 계획을 세우고 9월 12일 거사를 결행해, 조선총독부에 잠입하는데는 성공하지만, 불발탄이 터져 총독 처단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1922년 3월 28일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장이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오성륜, 이종암과 함께 거사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이도 실패를 하고 현장에서 영국인 여성만 즉사합니다. 쫓기던 김익상은 ‘상해시 구강로’에서 ‘사천로’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상하이일본영상관으로 잡혀갔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뒤 그 이후 행적이 불분명합니다.
1925년 옥중에서 순국했다는 말도 있지만 1943년 만기 출소했다가 경찰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현재의 중론입니다. 현재 어느 누구도 김익상이 언제 죽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김익상의 시신조차도 나온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하나의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받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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