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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

기억의 골목에서 마주한 멈추지 않는 눈물

by 조정림 2025. 7. 4.

권다영(클로버 등대/ 퍼실리테이터 와이퍼 4기)

 

"기억의 골목에서 마주한 멈추지 않는 눈물"

 

2025년 6월의 초여름,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임시정부의 자취를 따라’라는 주제로 마산 YMCA의 역사기행단의 일원으로 중국 난징을 찾았다. 짧지만 깊은 의미를 담은 여정 속에서 나는, 인간의 존엄과 기억의 무게를 전하는 한 공간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은 바로 2015년 12월 1일 정식 개관한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이다. 위안소를 주제로 한 전시관 중 아시아 최대 규모이다. 평안도 출신 박영심 할머니가 이곳 두 번째 건물 19번 방에서 3년째 위안부 생활을 했고, 2013년 11월 21일, 박 할머니가 현장을 찾아 ‘내가 있던 곳이 여기’라고 증언하자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 난징 중심부에 유적 진열관을 마련했다.

 



위안소 입구에 들어서자 마주한 ‘통곡의 벽’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얼굴을 마주하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임신한 박영심 할머니의 동상에서 걸음을 멈췄다. 우리 국민이 피해자인데 정작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진열관도 없고, 소녀상 하나 세우는것도 일본의 눈치를 보는건지 화가났다. 중국은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시민들에게 ‘잊어선 안된다’며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강조하며, 시민들은 이런 현장을 찾아 끊임없이 배우고 나누는데... 2015년에는 말도 안되는 협상안을 들고와 할머니들을 모욕했다. 생각하니 또 화가난다. 

리지샹 위안소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면 낮은 벽돌 건물들과 어두운 방들이 이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의 고통은 공기를 통해 전해졌다. 희미하게 남은 흔적들과 전시물, 그리고 벽에 걸린 생존자의 눈동자 하나하나가, 무언의 외침처럼 느껴졌다. 감정적으로 견디기 너무 힘든 곳이었다.

 


입장과 동시에 마주한 침묵은 무거웠다. 좁은 침상, 음침한 방, 낡은 철제 문고리 하나조차도 그 시절의 절망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곳은 그저 과거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아니었다. 그날의 울음과 공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증언의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전시물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 내 딸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소녀들 역시 누군가의 귀한 아이였고, 한 사람의 삶으로 존재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름도, 꿈도, 목소리도 지워진 채 하루에 30명이나 되는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일본군을 상대 했고, 살기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이었다.

 


우리 마산YMCA 역사기행단은 그 공간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묵념했다. 말을 아끼고, 마음으로 느끼며, 그 시간의 무게를 고요히 마주했다. 그 침묵은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책임이었다.

전시관의 마지막 공간에서 나는 '마르지 않는 눈물'이라는 이름의 흉상 앞에 섰다.
입을 꾹 다문 채, 눈물만을 흘리는 한 할머니의 흉상이었다. 수건으로 닦고 또 닦아도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는 그 흉상의 눈물 앞에서, 나도 조용히 할머니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단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시절 침묵당한 모든 여성들의 것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과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눈물이기도 했다.

 



역사기행은 며칠간의 일정으로 끝났지만,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에서의 그 하루는 내 삶의 한 페이지에 깊게 새겨졌다. 나는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여성으로서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 책임을 가져야 할까?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그 날의 침묵과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이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 리지샹에서 마주한 그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그 눈물이 완전히 마를 날까지, 우리는 기억하고 말하고 또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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