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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YMCA/만나러갑니다

크리스마스 밤, 무학산 계곡서 냉수 마찰?

by 이윤기 2024. 6. 5.

[만나러 갑니다] 60년 전 마산-Y 회원 류제우 

마산YMCA 회원들을 소개하는 「만나러 갑니다」 이번 달에는 1960년 대 초 중학-Y, 고교-Y 활동을 했던 류제우 선생을 회원들과 함께 만났습니다「마산YMCA 사람책 함께 읽기 4권」으로 선정된 류제우 선생을 현재 미국 실리콘벨리 인근(캘리포니아 레드우드시티)에 거주하고 계시는데지난 5월 22일 저녁 7시(현지 시간 새벽 3시온라인 줌 대담으로 인터뷰하였습니다허정도 역사편찬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온라인 대담을 기록으로 전해드립니다.

 

참가자 한 분은 60년 전에 마산ymca에서 활동을 하셨던 분이고, 더군다나 미국에 계시는데 이렇게 온라인으로 만나서 옛날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미국으로 가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해였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옛날 이야기를 듣고 우리 마산 YMCA의 80년 사를 또 한 번 더듬어 보는 그런 시간이 되었다고 해셨습니다.

 

 

허정도: 지금 여기 현장에 참석하신 분들은 모두 소개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인사를 한 번 해주시기 바랍니다.

류제우: 안녕하세요? 몇 년 전에 제가 미국에서 마산고등학교 후배를 만나가지고 얘기를 나눴는데, 한두 달 뒤에 마산에 ‘류제우가 치매에 걸렸다’는 소문이 났더라고 합니다. 제가 그때 후배하고 얘기할 때 말을 더듬었더니 그런 소문이 났더군요. 그래서 제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반갑습니다. 강의는 아니고 허 선생님이 질문하시면 제가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게 많은데 혹시 조금 틀리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최대한도로 사실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거는 모른다고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은 최대한도로 제가 기억나는 대로 얘기를 드리겠습니다.
여기 시간은 새벽 3시구요.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습니다. 지금 제가 지금 얼굴이 좀 많이 부었을 겁니다. 제가 수면 무호흡증 치료하는 것 때문에 얼굴이 조금 이상한데 용서하십시오.

 

허정도: 지금 캘리포니아 시간으로 새벽 3시입니다. 먼저 강사님 소개를 그리고 오늘 이 자리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 등을 간단하게 소개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80년사의 일부를 책을 한 번 냈는데요. 그 책을 쓸 때가 3년 전 여름, 20218월이었습니다. 책을 쓰기 위해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많은 문서들을 찾는 중에 오래된 YMCA 회보에서 류제우라는 이름을 찾았습니다.

“중학-Y 회장 최고 성적으로 마고 합격, YMCA 소년부 회원들은 모두가 우수한 성적으로 부산, 서울로 많이 입학되었으나 중학-Y 회장 류제우 군이 최고 득점자로 마고 합격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이런 기사가 있었어요. 마고 출신인 한석태 교수를 통해서 류광현 내과 아드님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마고 출신이 김형준 이사장이 이메일 주소를 찾아주었습니다. 무턱대고 이메일을 보냈는데, 다음날 바로 답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취재를 통해 1960년대 마산YMCA에서 활동했던 중학-Y, 고교-Y 활동을 전해 들었고, 흑백 사진도 여러장 받았습니다.

선생님 소개를 좀 드리자면, 마산가포동에서 출생하셨고, 월영초, 마중, 마고 졸업하셨으며, 당시 중학-Y 회장을 지냈습니다. 연대의대 졸업 후미국으로 가셔서 일리노이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그 대학병원 병리학 조교수로 좀 계시다가 시카코에 있는 원호병원으로 옮겨 평생 동안 근무를 하셨고 12년 전에 2012년에 하셔서 지금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시티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허정도: 자 그럼 본격적인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 21년도에 낯선 메일을 받았을 때 어떠셨습니까?

류제우: 좀 놀라고, 좀 많이 기뻤다고 해야 될 것 같은데요. 메일을 받고 옛날 앨범을 찾아서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60년 전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지요.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 집에 있던 앨범을 다 미국으로 가지고 와서 CD로 만들어놨는데 그걸 찾아내 사진들을 들추어 보면서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허선생에게 보내드린 사진들도 CD 속에 있었고 이번에 사진을 몇 장 더 보내드렸습니다.

허정도: 선생님 서울로 가기 전에 선생님 저기 마산에 살 때 집은 어디였습니까?

류제우: 마산시 중앙동 1가 1번지, 월영국민학교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신마산 역이 있었어요. 제가 태어난 곳은 가포동인데, 국립결행요양소가 있었거든요. 제가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거기에 결 의무과장 겸 환자 겸 계셨어요. 해방 직후에... 관사에서태어났습니다.

 

 

허정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렇게 사시다가 서울로 가셨는데 마산을 떠난 뒤부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해 주십시오.

류제우: 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방학 때는 마산에 내려와서 남행수 선생님하고 등산을 다니고 그랬습니다.(대한믹국 산악 박물관 자료 목록에는 남행수 선생이 류제우 군에게 보내는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서울서 사귄 친구들, 그리고 마산고등학교 동기들 하고도 등산은 많이 다녔지요. 그 무렵 저희 아버지가 이제 오동동 110번지 월남다리 근처에 건물을 하나 짓고 개업을 하셨어요. 방학 때 마산에 오면 등산도 다니고 농촌 봉사활동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창동을 알기는 아는데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허정도: 해군에서 복무하셨죠?

 

류제우: 해군에서 근무했는데, 처음 1년은 김포여단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인천에서 근무했어요. 그때 막 베트남에서 철수했을 때였는데, 월미도에서 근무하다가 병무청을 거쳐서 마지막에는 마산육군통합병원에서 제대했습니다. 제대할 때 이미 미국 이민 신청이 되어 있었어요. 그때 미국이 의사가 모자라던 시절이라서 외국에서 많이 수입하던 시기입니다. 제 선배들도 한 10년 전부터 미국에 많이 갔습니다. 77년에 미국 이민 프로그램이 없어졌는데, 제가 막차를 탄셈이지요. 월남전 직후라 패스포든 받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출국이 늦어져서 약속되었던 인턴자리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원래 하려고 했던 내과를 할 수 없었고, 우여곡절 시카고 대학에서 병리학 레지던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해도 아버지가 한국으로 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고, 혹시 한국에 가면 그런 게 필요할 것 같아서 대학원 미국에서 대학원 등록을 했습니다. 그 때 지도교수의 영향으로 조직병리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병리학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조직병리학과 임상병리학이 있는데 임상병리학은 피 뽑아가지고 피의 성분을 분석하고 이런 거고, 조직병리학은 어떤 형태의 움직임, 패턴 이런 걸 알아내는 그런 분야인데, 컴퓨터가 아직 발달이 안 돼가지고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제 아들이 컴퓨터 엔지니어인데 근데 요새는 그게 뭐 아주 쉽대요.

 

공부를 마치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조교수 자리를 얻어가지고 한 6~7년 동안 일을 했습니다. 막상 일을 해보니 승진도 쉽지 않고 연구도 많이 해야 해서 마음을 접고 원호병원으로 옮겨서 2012년까지 근무하였습니다.

허정도: 선생님 이제 YMCA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회원 활동을 했던 시기가 62년부터이죠. 마산 YMCA하고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류제우: 네 저희 아버지가 마산 라이언스 클럽 창립 멤버였는데, 거기서 YMCA 총무로 일하던 남행수 선생님을 만났어요. 제가 원래 몸도 마르고 약했고 마음도 약하고 그랬어요. 또 저희 아버지가 옛날에 결핵 환자셨기 때문에 운동도 제대로 못하시고, 저도 운동도 잘 못하고 그러니까 남행수 선생님께 저를 보냈어요. 남행수 선생님은 등산가 유명하셨고, 아마 기계체조도 사신 걸로 알고 있어요. 아버지 추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허정도 : 남행수 선생님은 제가 알고 있기로는 일본대학 철학과 출신입니다. 어떤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을까요?

류제우: 예 제가 듣기로는 원래 신학을 하시려고 일본에 가셨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신학을 못하시고 철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는 평안북도 선천에 있는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중에 알고보니까 제 여동생 시어머니와 그 학교 동창이시더라고요.

허정도: 그러면 YMCA에 처음 왔을 때, 기억이 희미하실 텐데 당시 YMCA 상황, 회관이라든지, 회관 위치나 건물의 모양이나 회원 등 당시 YMCA 상황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좀 말씀해 주십시오.

 

 

제비산 자락 YMCA 회관...흰글씨 간판, 2층 건물

 

 

류제우: 제가 중학생 때라 어른들 모임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남행수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없습니다. 당시 중학생 모임은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한 10여명 정도 되었을겁니다. 대게 동네 친구들이 많구요. 주로 주말에 모여서 활동했습니다. 제가 신마산에 살았으니까 버스타고 YMCA로 갔는데요. 오동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걸어서 올라가고 북마산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파출소 근처에서 내려서 걸어 갔습니다. 제비산(노비산) 앞에서 내렸는데, 북마산역 한 정거장 앞이었어요. 제비산을 올라가면 왼쪽에 호주 선교사였던 브라운 목사님 댁이 있고, 거기 대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골목을 틀어서 들어가면은 남 선생님 댁이었습니다.

 

2층 건물 앞에 YMCA라도 하얀 간판 글씨가 씌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경치가 좋았어요. 마산합포만이 훤히 보였습니다. 당시는 전화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YMCA에는 전화가 있었어요. 2층에 올라가면 오른쪽 방에 선생님이 계셨고, 그 뒤에 창고가 있었습니다. 등산기구나 책 같은 것이 거기 있었지요. 그리고 계단을 쭉 올라가면 조그마한 방이 있었는데, 그게 암실이었습니다. 남행수 선생님이 일본에서 사진 기술도 배우시고 등산하는 것도 배워 오셨던 거지요. 왼쪽으로는 집회실이 있었어요.

그리고 아래층은 오른쪽에 탁구대가 있었는데, 탁구장 바닥은 마루를 깔 돈이 없어서 그러셨는지 그냥 흙이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와서 탁구를 치고 그랬어요.왼쪽은 살림집인데, 부모님하고 수양딸로 남덕선이라고 저보다 6~10살 어린 아이가 있었어요. 그러고 이제 마당 뒤쪽으로 가면은 염소를 전염소를 키우고 계셨고, 남 선생님 아버님 되시는 분은 말수가 적어셨고, 외모는 꼭 간디처럼 생겼어요. YMCA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탁구장 간판인줄 알고 있었던 분들도 많았습니다.

 

허정도: 그때 자료를 보면 YMCA에서 성경을 가지고 영어를 가르쳤다. 그런 기록도 있는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류제우: 예. 저도 이제 그때부터 어렴풋이 나는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저도 그래서 많이 참석을 했는데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영어 성경 공부였어요. 선교사들이 많이 계실 때였구요. 제가 그때 애독하던 성경이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영어로 된 거를 열심히 읽었던 생각이 납니다.

허정도: 이제 등산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YMCA에서 갔던 산들은 이 주변 산이었을 텐데 주로 어디로 다녔습니까?

류제우: 당연히 무학산 하고 팔용산을 많이 다녔지요. 수 십번을 갔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갔던 데가 팔룡산 같아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거기서 자일을 타고 그랬지요. 그때 막 다리를 덜덜덜덜 떨면서 내려왔던 기억이 나요.

 

허정도: 팔용산에 큰 저수지가 있는데 기억나십니까?

류제우: 이름을 몰라가지고 최근에 찾아봤더니 봉암저수지더군요. 거기가 지금은 나무가 너무 울창해가지고 옛날하고는 아주 다르더군요.

허정도: 그런데 선생님 무악산 정상에도 여러 번 가보셨겠죠? 당시 신문에 보면 57년도 7월에 마산 YMCA 등산 서클에서 무악산 정상에 높이를 적은 표지목을 최초로 세웠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혹시 정상에서 나무로 만든 표지목 보신 적 있습니다.

류제우: 봤죠, 봤어요. 그걸 YMCA에서 세웠다는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는데요. 아마 남행수 선생님이 했을겁니다. 당시 마산산악회, 경남산악회를 이끌고 계셨거든요. 지금 학봉이라고 부르는 장소를 우리는 하봉이라고 불렀습니다. 무학 하봉, 중봉 이렇게 불렀는데, 그 곳에도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회원 중에 누군가가 그 표지석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가 남선생님께 크게 혼이 나는 걸 보았습니다.

 

허정도: 제일 인상적인 등산 행사가 대원사 계곡 캠핑으로 보이던데요. 여학생도 함께 갔던 사진이 남아 있는데 아주 재미 있었겠습니다. 그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류제우: 여학생은 이름이 안영숙이고, 여선생님은 문영숙이고 두 분 다 영숙이었어요. 그래서 남선생님은 큰 영숙이, 작은 영숙이 그렇게 불렀는데, 안영숙 사람이 그분이 저보다 1년 아래일 거예요. 당시 YMCA 회장(이사장)님이셨던 안영제(의사) 중앙교회 장로님의 셋째 따님이세요. 당시 대원사 캠핑에는 학생들이 10명 정도 갔어요. 그때 사진을 보면은 한상욱이라고 그 친구가 저희 옆집에 살던 친구고, 두형이라는 친구도 있었고 문서우라는 친구는 문영숙 선생님 동생이에요.

 

허정도: 지리산 천왕봉까지 등산을 하셨지요. 대원사에서 천왕봉이 굉장히 멀지 않았습니까?

 

류제우: 굉장히 멀죠. 캠프 프로그램의 하나로 천왕봉을 갔다오자고 하셨어요. 새벽 4시쯤 일어나서 출발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애들 데리고 힘들다고 말렸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1학년 생이 한 명 있었는데, 1학년은 힘드니까 캠프에 남아 있으라고 했거든요. 그 후배가 혀가 짧아서 나는 “죽어도 간다”는 말을 “죽으러 간다”고 해서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우스운 이야기 하나는 돌아가면서 식사 기도를 하는데요.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하더니 더 이상 말이 생각이 안나는거예요. “생각이 안난다” 하니까, 남선생님이 가만히 기다리다가 그냥 “아멘”아고 기도를 마친 기억도 남니다. 새벽에 천왕봉으로 출발했다가 밤 10시쯤 내려왔습니다.
대원사 근처 계곡에 텐트를 치고 지냈는데요. 그때 등산 장비라는 게 다 옛날 군대에서 쓰던 천막이었어요. 텐트 1개에는 남학생들이 다 한꺼번에 자고, 여자분들이 1개 쓰고, 남선생님이 따로 지냈던 것 같아요.

천왕봉을 다녀온 다은말에 폭품이 왔어요. 비가 많이 와서 계곡 물이 붓기 시작해서 민가로 대피를 했는데, 선생님등 여성 두 분을 보살피고 남학생들은 각자 알아서 대피 했는데, 나중에 보니 친구 한명이 없는겁니다. 부산고등학교에 다니던 이두영이라는 친구였는데, 깜짝 놀라서 남선생님이 찾으러 나갔는데, 길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더랍니다.

 

 

남행수,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 받은 개화 지식인

 

허정도: 한 겨울, 크리스마스 날 밤에 여기 무학산 계곡에 가서 냉수마찰을 하셨다던데?

류제우: 서원곡 계곡이죠. 그 때는 성옥꼴이라고 그랬어요. 마산 날씨가 따뜻하고 그러니까 따 크리스마스에도 냉수마찰을 하고 그랬습니다.

 

허정도: 오늘 남행수 선생님 이야기가 여러번 나왔는데요. 아시는 대로 남 선생님 좀 소개도 해주시고 또 어떤 것들을 가르치셨는지 기억나는 것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류제우: 남 선생님은 1917년 생이시고 평생 독신으로 사셨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일본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하시려다가 못 하시고 일본대학 철학과를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러분도)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치무라 간조라고 유명한 사상가가 있습니다. 삿포로 농업대학교를 나온 진보적인 일본의 신학자이고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특수한 기독교인이었죠 함석헌 선생님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성서 연구> 이라는 조그마한 잡지를 냈던 것 같아요. 남 선생님이 일본에 유학하실 때는 그 제자들하고 아마 소통을 하셨던 것 같고, 당시 성서 일본이라는 잡지를 구독하고 계셨어요. 당시 막 5.16 혁명이 일어나고 그럴 때니까 검 열기관에서 나와서 책장 안에 있던 어떤 책들을 없애기도 하고 삭제도 하고 그랬어요. 저도 그런 면에 있어서 조금 영향을 받았죠. 그러니까는 종교에 대해서 상당히 오픈 마인드 그러니까 열린 자세를 갖게 되었어요.

 

일본에 계시는 동안 민족 차별도 경험하셨겠지만 일본을 그렇게 나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어요. 특히 기억나는 것은 일본의 북알프스 산행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어요. 당시에도 산장이 많이 있었는데, 산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겨울에는 모두 산을 내려와도 겨울 등산객들이 다녀 가지만, 봄에 올라가면 지난 겨울에 두고 온 쌀이나 부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해요. 그러면서 무학산 상봉이나 하봉에 글씨를 새겨놓고 자연을 훼손하고 그런걸 보면 화를 많이 내시고 아주 만음 아파 하셨어요.

 

그리고 한국산악회에서 활동하시면서 한라산에 대피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구요. 한 가지 말씀 더 드릴 거는 한국산악회의 창립 멤버셨구요. 제가 태어나던 해 겨울에 한라산 적설기 등반을 개척 하시다가 조난을 당하였다고 해요. 강풍과 폭설이 내려서 조난을 당했는데 함께 가셨던 산행대장은 돌아가셨고, 남선생님을 동상으로 발가락을 다 절단하셨어요. 해방전에 조선산악회에서 활동하셨고, 한국산악회가 창립되는 동안에도 학술 연구, 탐사 등반 이런 것들을 많이 했어요. 울릉도에서 찍은 강치 사진을 보여주셨던 기억도 납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어린 중학생들 데리고 굉장히 리스크가 큰 대원사-청왕봉 등반을 하였잖아요. 아무 사고 없이 북마산역에 도착하니까는 부모들이 다 나와서 환영해줬던 생각이 나네요.

 

물도 씹어 먹어라, 등산을 할 때는 소처럼  천천히 오래 걸어라 

 

 

허정도: 청소년 시절에 만난 남행수 선생님께 받은 영향이 있을까요?

 

류제우: 너무 많습니다. 하나하나 다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 부모님이 이북에서 내려오셨고, 조금 자유스러운 분위기여서 버릇이 없고 그런 면이 있었어요. “밥을 먹을 때 감사해야 한다” 이런 걸 배웠어요.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열린 마음으로 다가 갈 수 있게 되었구요. “물도 씹어 먹어라” 하는 이야기 “등산은 소처럼 천천히 오래하는 것” 등이 기억납니다.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을 즐기고 감사하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제 기억 속에 젊은 시절 대원사의  푸른 신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시 종교 얘기로 돌아오면은 큰 도구마의 빠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남행수 선생님을 만나서 종교라는 게 아주 폭넓고 더 깊이가 있는 거고 복잡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허정도: 오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양하게 들었습니다. 오늘 함께 한 분들이 YMCA 후배고 고향 후배들인데 후배들에게 좀 해주고 싶은 이야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류제우: 네 이런 질문을 하겠다고 해서 미리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드릴 말씀이 없어요. 몇 년 더 오래 살았다고 해서 제가 더 현명한 것도 아니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제가 억지로 얘기를 한다면은 YMCA 마크에 있는 Spirit, Mind 있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좋겠어요. 우리가 어떠한 것에 대해 이름을 붙이면은 우리가 뭐 좀 아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을 하는 게 우리 마음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Body는 눈에 보이니까 비교적 쉬운데, Spirit, Mind를 꾸준히 다듬어 나가는 것은 좀 힘든 것 같아요.

 

허정도: 앞으로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류제우: 저는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에 가까워졌고 앞으로라는 것보다도 요즘 성 지도자라고 그래야 되나 그런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Here, Now에 살라 그러잖아요. 저도 많이 해보려고 애쓰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그랬는데 그게 굉장히 힘든 게 그거예요. 오늘도 다시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 이렇게 말을 더듬고 이야기 한 다음에 또 후회가 되는 거예요. 그런게 모두 과거에 사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앞으로 내가 뭘 해보겠다고 자꾸 욕심내는 그것도 미래에 사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근데 그 지금 Here, Now에 그냥 잠자는 때는 잠을 자는 그런 수양이 될지 모르겠어요.

허정도: 시간이 많이 됐는데 선생님도 피곤하실 테고 질문 좀 받겠습니다.

 

질문: 친지분들이나 지인들이 마산에 마산에 오실 계획이 있으신지 이런 것들 좀 여쭙고 싶습니다.

류제우: 마산의 친구는 육호광장 앞에 이동식 정형외과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북마산 어디서 살텐데 그 친구는 아들이 미국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가끔 미국에서 만나요. 그 외에는 뭐 이제는 다들 늙어가지고 연락을 못하고 있네요. 요새 비행기 값도 하도 비싸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형제들 간에도 연락 뜸해지는 것 같아요. 저희 누님은 돌아가셨고, 여동생은 서울에 있습니다.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 그 아들이 장기하라고 가수지요.

일동: 네 압니다. 아주 유명합니다(조카가 장기하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날 대담 중에 가장 청중들의 놀라운 반응이 나왔습니다).

 

류제우: 기하 어머니가 제 여동생이죠. 장기하가 “별일 없이 산다”는 노래 하잖아요. 그 노래에는 저희 아버님 사상에 들어간 거예요. 아마 저희 엄마 영향을 받아서 그런 가사가 나왔을 겁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한국, 정신적으로도 성숙하길...

 

 

질문: 오늘 말씀 행복하게 들었고요. 선생님 한국어 발음이 전혀 어눌하시지도 않다는 말씀 드립니다 사실 질문하고 싶은 내용이 저는 너무 많은데요. 딱 두 가지만 할게요. 오랫동안 미국에 이제 사시면서 바깥 미국에서 우리 한국에 대한 소식을 여러 가지 접하셨을 텐데 가장 놀라웠던 소식이나 기뻤던 소식, 혹은 가장 슬펐던 소식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구요. 미국에 여행 왔을 때 꼭 보여주고 싶은 곳 소개 부탁드립니다.

류제우: 한국은 물질적으로 굉장히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어요. 세계 어느 나라로 여행을 가도 한국분들이 너무 많으세요. 우리가 굉장히 발전했구요. (과거에) 우리가 일본에 뒤졌던 것은 밖에 안 나가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안타까운 점은 교육제도가 아쉬워요. 자기를 들여다보는 교육 그런게 아쉬워요. 제가 일본과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저는 일본 선불교를 인상 깊게 봤어요. 선불교의 좋은 점이 가만히 앉아 가지고 자기 생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거를 이렇게 쳐다볼 수 있는 거 잖아요. 나쁘다 좋다 이런 거 상관없이 자기 의식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그런 트레이닝 하는 게 선불교거든요. 그런 전통이 일본에서는 대중 속에 깊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런게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아까도 자기 마음이 얘기를 했지만 그 마인드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내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느냐 하는 거를 볼 수 있는 그 힘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 그런 습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여행 질문 많이 받는데, 미국은 한국의 5~60배나 되는 큰 나라이기 때문에 무슨 굉장히 복잡하고 다면화된 사회예요. 그래서 한마디로 미국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미국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것들을 가져다 한국 미디어에서는 크게 보도하거나 미국이 망한다, 트럼프 어떻다, 바이든이 어떻다 하는데, 미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에요. 너무 복잡하게 돌아가고, 사회 여러 가지 요소가 있고 여러 측면이 있고 그렇습니다. 한국 신문에서 말초 신경 자극하는 기사를 가지고 미국이 어떤 나라라고 하는거 절대 믿지 마세요.

 

다만, 딱 꼭 집어서 어디 가서 구경했으면 좋겠냐 하면 저는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그랜드 캐니언하고 옐로스톤을 추천합니다. 저도 다음 달에 가족 손자들하고 다 같이 옐로스톤에 가요. 처음 미국 와서 1년 후에 아내하고 낡은 자동차 끌고 거기 한 바퀴 돈 적이 있어요. 요새 많이 변했더라고요. 공원 그 자체가 경상남북도 합친 것만 할 거예요. 그랜드 캐년은 잘 아시다시피 비행기 타고도 그랜드캐년이 쫙 갈라진 게 보여요.

요즘 한국에는 자꾸 말을 너무 단순하게 하거나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그런게 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은 손흥민이 있잖아요. 손흥민이 베스트 선수이고 최고 전성기는 틀림없어요. 그렇지만 손흥민은 베스트 선수 중에 한명이에요. 제가 보기에도 참 소위 말하는 홍익인간을 대표하는 그런 아주 이제 완성된 축구 선수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손흥민 만큼 축구 잘 하는 그런 친구들이 여럿 있어요. 그런데 손흥민만 최고다 하면, 소위 요새 말로 국뽕이라고 그러는데 자꾸 국뽕만 키우면 우물안의 개구리가 될 수 있요. 앞으로 조금 더 시민들이 이 세상 여행다니면서 먹방만 찾지 마시고, 그들은 어떻게 사는 지, 그들의 장점은 뭔지, 배울 것은 뭔지 이런데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질문: 저도 그렇고 저희 조카도 그렇고 요새 젊은 사람들 보면 휴대전화랑에 빠져 살고 있는데요. 요새 이런 휴대전화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좀 궁금합니다.

류제우: 휴대전화는 그거 참 문제예요. 사실 컴퓨터 자체가 문제예요. 제 자녀가 둘이 있는데, 모두 어른이 되었지요. 저희 딸은 애들 컴퓨터 못 하게 해요. 아들은 컴퓨터 엔지니어라서 손자들은 맨날 컴퓨터 갖고 살아요. 그래도 스마트폰은 없어요. 아이들이 6살에서 10살 사이니까요. 컴퓨터라는 게 우리 영혼이나 마음에 스피릿 하고 마인드에 어떠한 영향을 주거든요. 스마트폰이 컴퓨터하고 전화하고 같이 섞어놓은 거 아니에요. 우리 머리에는 870억 개의 뇌세포가 있대요. 짬뽕같이 이렇게 압축돼 있는 게 우리 뇌인데 이렇게 복잡한 뇌가 그 중간에 시냅시스라고 서로 뇌와 뇌를 연결하는 게 했는데 요새 뭐 AI, AI 하지만은 아직도 우리 뇌를 따라가려면은 아직도 멀었어요. 제가 보기로는 그래요.
AI가 금방 어떻게 된다. 그러식으로 말하는데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내 머릿속에 컴퓨터하고 어떠한 작용들이 오고 가고 있냐 하는 거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해요. 제가 알기로는 불교에서는 우리 뇌도 일종의 컴퓨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 컴퓨터를 너무 어떠한 정신적으로 보는 면이 있어요. 저는 우리가 어떤 영적인 존재라고는 감히 자신있게 말씀을 못드리지만 정신적인 측면 것은 있다고 봐요. 예를 들면은 아주 쉬운 예로 형사가 범인을 미행 할 때 말이죠. 뒷 꼭지를 보지 말라고 그런대요. 왜냐하면 자꾸 뒷 꼭지를 보면은 피해자가 알아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어떤 연결이 있는거지요. 우리 두뇌가 와이어링 없이 블루투스처럼 연결된다는 거예요. 아무튼 저는 정답을 모르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허정도: 선생님 참 귀한 인연으로 오늘 이런 자리가 마련됐는데, 마무리로 한 말씀 주시면 그것으로 마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류제우: 한 반중에 이렇게 만나서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했는데 많은 불편을 안드렸었으면 좋겠습니다. 서투른 한국말을 하는 걸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정말 만나서 반갑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중학생들 데리고 천왕봉을 다녀오는 무모한 산행을 했었다는 말씀을 하시길래, 저는 요즘도 YMCA는 7살 아이들을 데리고 매년 지리산 노고단에 등산하러 간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청소년들과 자전거 타고 임진각까지 국토순례를 하는 무모한 도전도 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60년 일찍 활동하셨던 선배님께서 Mind와 Spirit 관한 고민과 당부의 말씀을 주셔서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사실 저희가 이제 아이들과 청소년들 만나면서 이렇게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키울 건가 하는 고민들을 늘 가지고 있는데 마침 그런 말씀을 주셔서 그 고민을 좀 더 깊이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산YMCA 사람책 함께 읽기 4권 - 류제우 온라인 대담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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