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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문기행단, 역사의 현장 진주를 만나다.

by 조정림 2021. 9. 29.

김태석 (마산YMCA 시민사업위원장)

9월 11일 10시 진주성 공복문(북문) 앞 주차장. 시민대학 2기 진주 편 강의를 들은 수강생들이 진주성을 답사하기 위해 모였다. 사적 모임은 아니지만 코로나 19 시대에 20명 정도가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형형색색의 거리두기 우산을 들고 성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는데, 길라잡이 조창래 선생이 이끈 곳은 성 밖의 밑돌이었다. 임진왜란 후 진주성 내성을 개보수 한 흔적인데, 군역들의 출신, 즉 단성, 하동, 곤양 등이 기록돼 있었다. 대학 때 심취한 ‘나의 문하유산 답사기’의 ‘아는 만큼 보인다’란 문구가 다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성 안으로 들어선 일행들을 처음 반긴 건 김시민 장군 동상. 1차 진주성 대첩을 이끌고 2차 전투 때 순절한 충무공에 대해선 대충 알고 있었지만, 장군의 동상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맞느냐는 선생의 지적에 ‘아, 또 한 수 배우는 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영남포정사에 이르렀다. 진주성 내 관찰사(도지사) 집무실인 선화당으로 가는 정문이다. 옆엔 하마비도 있고 과거 문을 달았던 흔적도 있다. 진주는 1925년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소재지였다. 


 발걸음을 북장대로 옮겼다. 성 북쪽의 지휘대인 셈이다.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지 않고 보전된 몇 안 되는 건물인데 보수작업이 한창이었다. 이전에 진주성을 몇 차례 돌아봤지만 주 도로를 따라 진주박물관으로 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역시 답사의 묘미는 이런 데에 있다. 북쪽 능선을 따라 올라가며 진양 하씨, 진향 정씨 소유의 민간 건물들을 내려다 봤다. 진주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라 했다. 1963년 국가사적지 지정 전에는 성 내에 민간인들이 거주했으며, 1979-1984년 진주성 정화작업 때도 하씨, 정씨 건물은 철거되지 않았다. 진주에는 하씨, 정씨, 강씨 3대 성씨가 있는데 인구 뿐 아니라 영향력도 커서 ‘진주는 3대 성씨들이 쥐고 흔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얼마 전엔 종친회에서 철거 반대 기자회견을 했다. 이들에게 좋은 땅을 제공하고 진주성의 본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진주시와 진주시장의 리더십이자 정치력이라 하겠다. 


 답사를 시작한 지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시간이 없어 국립진주박물관은 밖에서만 보기로 했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작품이다. 김수근은 일본 유학을 한 탓인지, 부여박물관 등 일본 건축을 연상시키는 건축 양식으로 비판받는데, 진주박물관의 지붕 역시 딱 보면 후쿠오카성 등이 생각날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호국사와 창렬사 앞엔 진주성 서문이 있다. 여기서 비화 한 가지. 이인안 부이사장님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 가까운 대아고 학생들이 서문으로 들어와 성에 놀러왔다고 양아치들에게 돈을 자주 뺏긴 곳이라고 한다. 진주성 내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이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이제 성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서장대로 향한다. 진주성 서쪽 절벽 위쪽에 있는 서장대는 남강과 망진산, 신안동과 평거동 신도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풍광을 자랑한다. 여기서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 망진산 정상은 과거 봉수대가 있었고, 그 뒤로도 유적들이 발견돼 보전해야 할 곳인데, 470억 원을 들여 비거테마공원을 조성해 비거 글라이더(짚라인), 모노레일, 유스호스텔을 짓는 다는 계획을 진주시가 발표했다고 한다. 참으로 천박한 발상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진주성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건물과 시설들이 많은데, 진주농민항쟁기념비와 3.1운동기념비가 있는 것을 아는 이도 많지 않다. 특히 진주 3.1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나선 만세의거로 진주성 전투부터 이어져 온 진주정신이 계승된 것이라고 한다. 진주성 하면 촉석루 아닌가. 근데 여수 진남관, 통영 세병관처럼 국보는 아닐지라도, 밀양 영남루와 같이 보물 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웬걸 작년에야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알고 보니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됐다가 6.25 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73년에야 재건한 것이었다. 문제는 누각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원래는 나무로 돼 있었는데 당시에 돌로 복원했다는데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촉석루 옆에는 논개를 모신 사당, 의기사가 있다. 애초엔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를 영정으로 모셨는데, 진주시민행동이 2005년 논개영정을 떼냈다. 행정이 못한 것을 시민단체가 대신 해준 것이라고 할까. 


 국보 1호인 남대문. 남대문이 국내 최고의 문화재는 아닐지라도 국보 1호로서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렇다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호는 무엇일까. 바로 1619년 진주 지역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세워진 김시민 장군 공적비다. 전체 높이는 277cm, 너비는 99cm다. 비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위급한 병중에서도 오랑캐를 물리치신 것은 충성심이 솟구쳤던 때문이요, 죽음으로써 지키며 떠나지 않은 것은 의로움에 의해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요,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리친 것은 용맹을 드날린 때문이다” 


 이제 진주성 내성만 답사를 하면 진주성의 면모를 오롯이 접했다고 할 수 없다. 최근 빠르게 발굴되고 있는 4km 외성의 유적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답사 완료 시간이 임박한 지라 조창래 선생은 일행들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선지 마음은 급해 보였다. 일단 촉석문을 나오면 삼국시대부터 고려 토성까지 발견되고 현재도 발굴이 진행 중인 진주성 광장이 반긴다. 과거엔 남강쪽 도로가 없었고 남강이 진주성 외성과 바로 접해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장어거리와 관공서들이 있었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유적들이 훼손됐을까. 발굴 중인 광장 외에는 진주성 외성의 흔적들은 많지 않은데 그 중 하나가 성의 해자 역할을 한 대사지다. 외성 밖으로 광범위하게 조성된 연못인데 진주경찰서, 진주교육지원청 등의 건물들은 주변보다 낮은 터에 조성돼 바로 대사지 위에 건립된 것이라 한다. 또 하나. 진주경찰서 앞 도로는 이상하게 둥글게 굽은 형태인데 바로 외성의 곡선을 살려 도로를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 또한 그냥 무심코 지나가면 절대 알지 못할 것들이었다. 이후에 시간이 나면 외성을 따라 그 흔적을 찾아보는 일도 재밌지 않을까. 


 같은 경남에 살지만, 또 창원에 접해 있는 도시지만, 심지어는 진주시민조차도 진주(眞珠)같은 진주(晉州)를 제대로 알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대학 답사를 준비해 주신 여러 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린다. 시민대학, 다음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진주 월아산 청곡사와 LH토지주택박물관, 문산성당은 지면 관계 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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