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러갑니다> 7월에는 올해 법적으로 노인이 되신 이종호 이사님을 만났습니다. 1980년 3월, 고향이 청주였던 스무 살 청년은 6개 월만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고 마산에 왔다고 합니다. 교회 중고등부 학생회장을 했던 청년은 입학 후에 기독교 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회장이 되었고, 군대를 다녀온지 1주일 만에 마산YMCA 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45년 동안 YMCA 활동가로, 이사, 위원으로 그리고 회원으로 활동해 온 이종호 회원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
이윤기: 되짚어보니 마산YMCA 45년 차 회원이신데요. 현재 마산YMCA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는지 소개 바랍니다.
이종호: 네 우선 총회에서 회원들이 뽑아 준 마산YMCA 이사로 활동하고 있고, 시민사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리고 기진맥진 산악회 활동도 하고 있네요. 마산YMCA에서 회원활동을 다시 시작한 것은 통영YMCA 사무총장을 그만두고 마산에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 기진맥진은 김태석, 조정순, 박수연 이사를 비롯한 여러 이사들과 함께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였구요.
이윤기: 제가 알기로 이사님 고향이 청주이시고 가족들도 청주에 계시는데 마산YMCA에서 회원과 실무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뭘까요?
이종호: 그걸 다 이야기 하려면 사연이 좀 긴데......나는 원래 뭐 목사가 되려고 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주변에서 목회자가 되라고 권했고, 나도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윤기: 제가 이사님과 3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예?
이종호: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나가던 교회가 청주 서문교회라고 학생들이 엄청 많았고 내가 학생회장을 했어요. 내가 교회에 친구들을 100명 이상 전도했어요. 전에 YMCA 아침논단에 오셨던 변상욱 선배가 어럴 때부터 교회활동을 함께 했지요. 아무튼 교회 학생회가 엄청활성화 되었고 학생회장을 하면서 찬송 인도도 잘하고, 부흥회 때도 사람들을 잘 이끌고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도 강력히 추천했고 나도 신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엄청나게 반대했어요.
이윤기: 그럼 부모님은 기독교인이 아니셨어요?
이종호: 그 때는 아니셨지. 나중에 내 동생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아무튼 내가 목사가 되는 건 그때 그렇게 반대를 하셨어요.
이윤기: 목사 하셨으면 진짜 잘했을 것 같은데...
이종호: 내가 생각해도 잘 했을거 같아요. 부모님 반대도 있었고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도 작은 사고가 있어서 대학을 진학하면서 청주를 떠나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향을 떠나서 지내보자 하고 온 곳이 마산이었고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마산에 왔어요. 경남 공전에 입학했는데, 한 6개월만 있다가 다시 청주로 올라가서 재수해서 대학 갈 생각을 하고 왔었지요. 처음엔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지요. 학교에 가보니까 대학YMCA가 있더라고요. YMCA가 기독교 청년 모임이라고 해서 가입했지요. 원래 마산에 내려오면서 오동동교회에 출석했어요. 청주 우리 교회 목사님 소개로 오동동교회에 다니면서 대학YMCA 활동을 같이했죠.
이윤기: 대학YMCA 활동이 평생YMCA 활동으로 이끌었네예?
이종호: 맞아요. 처음엔 시민운동 단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기독교 단체라고 생각하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내가 원래 목회를 하고 싶었으니까 대학YMCA 활동으로 목회자처럼 활동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요. 그런데 당시 황주석 간사님이 막 마산에 내려와서 대학Y를 만들고 교육하고 하는 그런 시기였어요. 이영환 선배(전 마산YMCA 사무총장)도 그 때 만나 같이 대학YMCA 활동을 했지요. 원래 잠깐만 있다가 청주로 가려고 생각했는데, 금새 1년 지나버리고, 2년 지나버리고 졸업하고 바로 군대를 갔다 왔어요. 대학Y 활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인지, 군대 제대하고 오자마자 일주일 만에 마산YMCA 실무자로 근무를 하게 되었어요.
1984년 12월 14일 날 제대를 했는데, 며칠 있으니까 이영환 선배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마산으로 내려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때 만나서 YMCA에서 일하기로 했고, 정식 근무는 85년 1월 1일자로 시작했지요. 그때 이영환 선배는 대학을 졸업하고 마산YMCA 간사로 먼저 일을 시작했더라구요.
그런데 막상 YMCA에 들어와 보니까 내가 모르는게 너무 많았어요. 사회에 대한 물정을 잘 몰랐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하는 청년 회원들도 만나고 해야 하는데 내가 사회운동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너무 부족했어요. 따로 공부를 좀 해야겠다 싶어 3개월 정도 휴직을 하고 독서 모임에 가서 집중적으로 학습을 하면서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이윤기: 그때는 실무자가 많지 않아서 한 사람이 여러 일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종호: 맞아요. 내 역할을 찾아나가기 시작하고 나니 정신없이 바빴어요. 지금으로 치면 사회 교육부하고 아기스포츠단 그리고 청소년부까지 맡아서 해야하는 구조였어요. 지금이나 그때나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보니 실무자를 자꾸 늘일 수도 없고 그랬던 것이죠. 레크리에이션 강사 일을 시작한 것도 우연한 기획에 시작되었는데, 기타도 못치면서 사회를 보러 나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한다고 하고 나도 적성에 잘 맞았어요. 그러면서 청년들과 만날 때 했던 레크리에이션을 각 사업장에 들어가서 진행해주게 되었고 87년 무렵에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지요.
이윤기: 듣다보니 레크리에이션 지도자의 자질은 중학교 때부터 이미 교회에서 학습이 시작된거라고 볼 수 있겠네예.
이종호: 그렇지 중학교 때부터 교회에서 사회보고 진행하고 찬양도 이끌고 그랬지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 응원단장도 하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우연히 제안을 받고 레크리에이션 지도를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어렵지 않더라구요. 그리고 행사를 진행하면 급여보다 더 많은 강사비를 주더라구요. 그래서 그때부터 이게 돈이 되겠구나 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어요. 85년 10월인가? 12월에 금문교 나이트클럽에서 행사를 하고 처음으로 강사비를 받고 나갔어요. 이걸 수익사업으로 해야겠다 싶어 그때부터 문의가 들어오면 다 나갔지요.
87년부터 노동조합 결성이 막 이루어지면서 현장에서도 레크리에이션과 문화프로그램에 대한 요구가 많아져서 쟁의 현장, 파업 현장도 많이 다녔어요. 그렇게 열심히 노동현장을 다니다보니까 경찰 정보과나 안기부에서 이사회에 압력이 들어오고 YMCA 간사가 왜 자꾸 저런데 가서 노동자를 선동하느냐? 하는 문제 제기를 받고 그랬어요. 6월항쟁이전부터 90년 초반까지 집회장과 노동쟁의 현장에 엄청나게 많이 다녔던 것 같아요. 마산YMCA 노동자 캠프도 현장 노동 청년들이 많이 참가했구요.
이윤기: 대학 다니던 저도 당시 노동자 집회에 많이 다녔는데, 그 때 사회 본 사람이 이사님이셨군요.
이종호: 아마 그럴거예요. 그러면서 노동 현장과 소통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많이 했어요. 청년아카데도 하고 시민노래마당, 시민놀이마당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노동조합 활동하는 청년들이 많이 참여했어요. 그러다보니 또 다시 사업장에 강사로 초청 받아 나가게 되었고. 처음에는 이사회에서 압력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이사회에서 연맹을 통해 압박을 하더라구요.
원래 보수적인 교회 목사가 될 뻔 했는데, 마산YMCA를 만나서 생활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사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내 역항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이윤기: 제가 88년 가을에 이영환 총무하고 면담하고 자원지도자 활동을 시작할 때 선배님은 청주로 가셨다고 하더라구예.
이종호: 1985년부터 마산YMCA 간사로 일하다가 고향에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88년에 청주YMCA로 갔어요. 청주YMCA 간사로 일하던 차윤재 선배도 그때 처음 만났지요. 내가 청주YMCA에 출근하려고 가보니, 당시 청주YMCA는 차윤재 간사를 비롯한 실무자들이 민주화 투쟁을 하고 있더라구요. 이런 분위기를 모르고 갔다가 6개월여를 출근도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지요. 황주석 선배나 차윤재 선배도 좀 기다리는게 좋겠다는 의견도 줬고. 6개월쯤 지난 후에 서로 이해하면서 청주Y 활동을 시작했지요. 청주YMCA에 약 1년 정도 있으면서 어린이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맡았는데, 정말 모집이 잘 되었어요. 당시에 청주YMCA 사람들이 깜짝 놀라더군요.
청주YMCA에서 보수적인 이사회와 사무총장 때문에 마음을 못잡고 있었는데, 마산YMCA 박종석 이사장이 청주로 찾아와서 다시 마산YMCA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마산으로 오게 되었지요. 다시 내려왔을 때, 이윤기 사무총장도 마산YMCA 자원활동가로 일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마산YMCA 활동도 오래하지는 못했어요. 88년 도에 이영환 총무가 사무총장이 되었는데, YMCA 재정은 어렵고 이사회와 연맹에서는 노동조합과 연대활동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하여 견제와 압박이 지속되었어요. 결국 이남주 부장하고 면담을 하고나서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었어요. 1991년인가? 1992년인가? 마산YMCA 실무자 활동은 그때까지였네요. 아무튼 레크리에이션 이벤트 회사를 만들어서 독립하게 되었어요. MBC, KBS 등 방송 출연이 많아지면서 한 달에 행사를 100건 넘게 할 때도 있었어요. 실무는 그만뒀지만, 레크리에이션 강습회에는 매년 몇 차례씩 강사로 참여했고,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도 마산YMCA에는 자주 왔지요. 노동자배움터교실, 노동자캠프에도 꾸준히 참가했고.
이윤기: 그럼 다시 YMCA 활동가로 복귀하신 것은 충주YMCA로 복귀 하신건가요?
이종호: 이벤트 회사를 하다가 크게 부도를 맞아서 힘들 때였는데, 청주YMCA에 연맹에 계시던 강영일 사무총장이 오면서 충주YMCA 개척을 도와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충주에서 창립 준비를 시작했는데, 막상 가보니 작은 사무실 하나 구해놓고 아무것도 없는거예요. 교회 목사 대여섯 사람하고 장로들하고 모아놓고 YMCA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청주YMCA처럼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들이 모여있더라구요.
제가 가서 YMCA는 좀 개혁적인 진보적인 일을 함께 해야 된다고 설득도 하고, 또 지역 연대 활동에도 참여했더니, 이사회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어요. 경험부족이죠. 그러다 보니 서로 힘들어지고, 급여도 제대로 안 나오고 하면서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렵게 되었지요. 청주에서 충주로 약 1년을 출퇴근하고 아쉽게 그만두었어요.
이윤기: 그다음에 통영YMCA를 개척하신건가요?·
이종호: 바로 통영으로 온 건 아니구요. 청주YMCA를 그만두고 2년 정도 경실련 활동을 돕고 있었지요. 당시 마산YMCA에 계시던 차윤재 선배가 내가 통영에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남협의회 차원에서 통영YMCA 설립을 추진하자고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2001년부터 통영YMCA를 시작했지요. 그래서 통영으로 왔는데 예전에 막 이벤트 회사하고 방송하고 할 때 통영 사람들하고 친해져서 선후배도 많았구요. 특별히 안휘준 원장이 통영YMCA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주면서 통영Y 창립을 해나가게 되었어요. 제가 통영에서 8년 정도 일했는데, 특히 처음 YMCA 창립을 시작할 때 시민운동 불모지에 YMCA가 창립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컸고, 많은분들이 거들어 주셨어요.
그래도 통영에서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초기 1년 동안 최병춘 간사하고 6개월 이상 집에도 못가고 고생고생해서 창립하고 아기스포츠단도 모집하고 했지요. 5~6년 정도 재미나게 활동하다가 지역 국회의원 비리를 고발하면서 여러 가지 불편한 일들이 생겨 정리하고 고향으로 다시 갔어요.
이윤기: 마산에 다시 오신 건 언제였지요?
이종호: 기억하겠지만, 2010년 마창진이 통합하기 전에 허정도 전 이사장님이 마산시장 출마준비를 했어요. 그때 허정도 이사장님과 그 준비를 같이했어요. 행정구역이 통합되면서 결국 시장 선거를 해보지도 못했지만. 그 무렵에 마산YMCA 시민사업위원회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쭉 마산에서 활동하고 있는거죠.
이윤기: 제가 알고 있는 선배님의 가장 큰 재능은 레크리에이션 강사, 혹은 진행자인데요. 스스로 생각할 때 노력형인가요? 천재형인가요?
이종호: 나는 천재형은 아니지만 타고 난 끼와 재능은 있었다고 봐요. 프로그램을 치밀하게 짜서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관객의 호응을 보면서 분위기에 맞게 프로그램을 변경하는데, 그게 더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거든요. 내가 가진 감각대로 하는데 사람들은 더 좋아하는 것. 그런게 있어요.
이윤기: 지금까지 길게 YMCA 활동 이야기 하셨는데, YMCA 말고 다른 사회활동은 뭐가 있을까요?
이종호: YMCA 간사들이 다 비슷하겠지만, 흔하게 얘기하는 사회단체 활동이라든가 이런 거는 전혀 해본 적이 없고 YMCA 활동에만 올인 했다고 할 수 있어요. 동창회나 이런데도 최근들어서 나가고 있지요.
이윤기: 이사님께서는 젊은 시절에 회원활동도 하시고, 마산, 청주, 통영에서 15년 넘게 실무자로도 활동하셨고, 실무자 출신으로는 드물게 마산YMCA 이사, 위원으로도 15년 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실무자와 유지 지도자의 역할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종호: 네 저는 YMCA 운동은 전문 지도자인 실무자와 이사, 위원 등 유지지도자 그리고 회원으로 이루어지는 세 축이 균형을 이루고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몫은 전문적으로 YMCA 일을 하는 활동가의 역할이라고 봐요. 회원활동도 중요하고, 이사, 위원들의 참여도 중요 하지만 활동가들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어떤 사업을 만들고 집행하느냐에 따라 회원 지도력도 성장하고 회원 운동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실무자의 권한이 크다는 것이 아니라 책무가 크고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마산YMCA는 유지지도력과 전문지도력이 잘 소통하고 협력하는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고 봐요. 유지지도력과 전문지도력이 중심이 되어 회원운동도 활성화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회관이 있고 실무자도 많아지고 위탁 시설도 늘어나지만 여전히 재정은 어렵고 적지 않은 대출금도 남아 있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요. 돈 많이 벌 수 없는 것은 비영리단체의 숙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이윤기: 마산 YMCA가 회원이 더 많아지고 재정이 넉넉해진다면 어떨 활동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요?
이종호: 세상이 빠르게 많이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80년대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90년대부터 시민운동이 활성화 되었다고 봐요. 2000년 대에는 YMCA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권력 감시운동, 시정, 의정 참여 활동을 주력했던 것 같구요. 교통문제, 환경문제, 도시문제에 대한 관심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최근에 내 느낌은 정당들이 실제로 과거 시민단체가 하던 역할을 많이 하고 있고, 또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두 차례 탄핵과 여러 차례 선거를 거치는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효능감도 생기고 시민들의 참여의식도 많이 높아지는 것 같고 그래요. 이제는 좋은 후보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이윤기: 선배 실무자로서 후배 실무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이종호: 앞서 얘기했지만 YMCA운동은 전문활동가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만으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길게 보고 넓게 보면 다른 걸 많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윤기: 요즘 가장 열성적으로 활동하시는 데는 기진맥진이잖아요. 기진맥진의 저력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종호: 재미있다는게 가장 큰 장점이지요. 좋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YMCA 활동도 같이 의논하고 그런 과정에서 YMCA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 확대되는 것 같요. 일석삼조는 되는 것 같아요. YMCA활동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재미있게 산행하고, 즐겁게 친교하는 것. 그래서 재미있다는 것이 핵심이네요. 다른 산악회나 동창회 모임하고 차원이 다른 재미와 진지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울러 다른 YMCA 활동, 좀 진지한 혹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그런 데서 만들어지고 또 거기서 인간관계가 끈끈해지는 것 같아요. 이사회나 다른 위원회 활성화에도 기진맥진이 직접, 간접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봐야할꺼예요.
이윤기: 이제 좀 가벼운 이야기를 여쭤볼께예. 형수님이 레크리에이션클럽 회장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이종호: 1980년대 후반에 레크리에이션이 대 유행이었어요. 마산YMCA에서 레크리에이션 강습회도 개최하고, 강습회 참가자들과 함께 지속적인 활동을 같이 하는 연구모임도 만들었지요. 아내는 마산YMCA레크리에이션연구회 회장을 지냈지요. 아내는 창원에 있는 꿈OO 유치원 교사였는데, 레크리에이션을 배우러 왔다가 수료 후에 클럽 활동에 참여했고, 제가 레크리에이션클럽 담당 간사였기 때문에 오랫 동안 같이 활동하고 놀러다니고, 수련회도 다니고 했지요. 그러다가 우연치않게 눈이 맞아가지고 사귀고 결혼하게 되었어요. 그때 YMCA 간사는 돈 많이 벌고 그런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좀 먹여 살려줘야 한다”고 했는데, 흔쾌히 승낙하더라구요. 그런 점에서 보면 긴 시간 힘들게 YMCA 간사로 오랫 동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윤기: 선배님, 자녀가 세 명이잖아요. 아이들은 평생 YMCA 활동을 했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합니다.
이종호: 전에 첫째가 대학 다닐 때 “아빠가 사회를 위해 일하시는 거 존경한다. 대학생이 되어서 사회를 보는 눈이 열리고 보니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는데, 좀 뜨금하기도 했지만 깜짝 놀랐고 한 편으로는 감동을 받았어요. 둘째 한테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네요. 첫째는 집 사람 임신한 상태에서 집회도 다니고 최루탄도 맞고 그렇게 자랐지요.
이윤기: 자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나에게 YMCA란 OOO이다.
이종호: 나에게 YMCA는 내 인생의 전부다.
젊었을 때는 다른 일을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도 하고 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YMCA운동을 할 때 가장 빛났던 것 같아요. 요즘들어 경험이 쌓이고 나이 들어가면서 새롭게 보이는게 있다는 생각을 많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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