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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활동

마산 역사 벨트...임항선 따라 걷기

by 조정림 2024. 11. 4.

신주현 (역사와문화 회원)

 

"11월 2일 역사와문화 2차 답사기"

유장근 교수님이 왜 YMCA 사랑하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은 

30대 중반이 되니 마산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석사 준비하느라 이번 답사를 참석할지 말지 고민을 30초 정도 했지만 "마산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0초 고민이 정말로 창피했습니다. 사전 모임에서 자료도 준비하는 막내의 모습을 보여야 했지만 역사를 사랑하는 회원님들을 보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장근 교수님께서 YMCA를 사랑하셨던 게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습니다. 당시에 교수님께서 왜 학과 학생들보다 YMCA를 더 챙기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마산의 골목 투어나 최치원 선생님의 흔적 찾기 조심스럽게 제안해 봅니다. 

답사가 시작되다.

1:00에 도착해서 주변을 벤치에 앉아서 논문을 보려고 했지만, 마침 마산 산업자원 홍보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가봤습니다. 방문객이 없는지 문을 잠그고 계셨습니다. 두드리니 나오셔서 맞이했지만 해설사가 나보다 많이 모른다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했고, 당시에 한일합섬이나 마산 자유수출 지역에서 근무했던 분이 설명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만 맥락 없이 붙어 있는 사진들. 마산 자유수출 지역이 설치된 배경이나 향토기업의 역사가 주제 없이 설치되어 있어서 마산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30, 3.15의거 탑 참배로 허정도 이사님께서 답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3.15의거 기념탑의 위치가 잘못되었고 기념비의 목적을 상실한 위치 다툼,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참. 예나 지금이나 뭘 하는것인지.. 학생들이 저렇게 목숨을 걸고 얻어낸 민주주의를 어른들이 위치를 갖고 싸우다니..’ 맘이 안 좋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어른들도 참여했지만, 시작은 학생이었는데 ‘남성동파출소 인근이나, 육호광장을 조금 손봐서 세우면 좋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봤습니다 

허정도 이사님은 3.15 의거 관련 시를 볼 때는 날짜를 잘 봐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발표일(4월 26일)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를 다르게 평가해야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시’는 고등학교 수능 이후로는 접할 기회가 없어서 안봤는데 이번 계기로 찾아서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앞에 몽고정이 있었는데 이승준 위원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몽골의 정동행성이 당시 마산에 국제사회의 첫 등장이었다고 합니다. 몽고정 원래는 고려정이라 불리지 않았겠냐는 추측을 해봅니다. 몽고(蒙古)는 ‘덮을 몽에 예고’라고 적혀 있는데 어쩌면 일본인은 여기를 몽골(矇瞽)을 장난쳤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바로 몽고간장 공장 옛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조금만 신경을 쓰면 몽고간장과 협업해서 간장 축제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셔터가 내려져 있지만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곳을 민간에게 오픈하여 지역에 향토기업에 홍보하면 좋겠다 생각도 들었습니다. 옆으로 가면 몽고간장 기업 비가 보입니다.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는 3.15의거 당시 총탄 자국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사실 역사학과에는 지역사가 교육과정에 없습니다. 어쩌면 지역 역사학과 대학생들이 지역을 더 모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마항쟁과 더불어 3.15 역시 지역에서 깊게 다뤄봐야 할 주제라는 생각에 석사를 마치게 되면 3.15를 공부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조금 걸어서 신신예식장에 도착했습니다. 
신신예식장은 무료로 결혼할 수 있는 곳으로 대표인 백낙삼님은 전국에 마산의 이름을 알리는데 대단한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작년에 돌아가셨지만, 끝까지 봉사하는 마음으로 축복을 담아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무엇이 그를 열정 가득하게 살게 하셨을까 생각해본 계기였습니다. 지금은 아들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지역에 봉사 정신이 가득한 분들이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도 느꼈고, 언제 한번 저분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1905년 시작된 마산 철도 


이어 철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고 임항선에 대해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경전선은 마산역에서 마산항을 잇는 총연장 8.6km의 철도노선인데 임항 선이라고 하면 대개 이 노선을 가리킵니다. 1905년 마산선의 일부로 개통된 이후, 1977년에 경전선은 마산 시내 구간 정비사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임항선이 경전선 본선이었습니다. 

 

지금은 경전선이 옛 마산시 외곽을 통과하지만, 1977년까지는 스위치백 비스름한 형태로 운행되었는데, 열차가 마산 시내를 통과해 옛 마산역에 도착하면, 기관차 방향을 전환하여 마산 시내를 빠져나가는 형태로 운행하는 식이었습니다. 덕분에  운행 시간이 상당했습니다. 게다가 마산선은 부림시장, 경남선은 성호초등학교 뒤쪽이라는 옛 마산의 도심지역을 그대로 관통했기 때문에 교통, 소음, 매연 등의 문제가 따라왔습니다.

대한민국 철도청이 마산 시내 구간 이설을 결정하고, 1977년 현 마산역 자리에 통합역사를 새로 지으면서 구마산-옛 마산역 구간 주변 철로를 완전히 걷어내고 마산항-교원 구간은 그대로 남겨둔 채 함안에 2가 도교를 통해 마산-중리 구간을 연결하는 것으로 정비를 마쳤습니다. 이걸로 경전선이 대략 10km 짧아졌습니다. 나무위키에서 발췌 

 

이 구간을 설명하는 중에 자전거 타고 지나가시던 분이 멈추고 설명을 함께 들었습니다. 그리고 임항선 길 따라 임화의 옛집이 있었던 공간에 멈춰 섰습니다. 임항선에서 허정도 이사님이 낭독한 임화의 일기을 들으니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마산은 당시 결핵환자들이 와서 치료할 만큼 주요한 결핵병원이 있었는데 당대의 문인들이 마산에 와서 치료받곤 했습니다. 그 당시 이상하리만큼 결핵환자들이 많았습니다. 결핵에 대한 자세한 논문은 경남대학교 기록학에서 대학원 학위논문이 있으니 참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임화
임화(林和, 1904-1969)는 한국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복잡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현대 시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임화는 그의 작품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뇌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았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시집인 《임화 시집》과 여러 수필이 있습니다.

지하련

지하련(池河蓮, 1912-1960?)은 거창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부유한 집안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일본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1936년 카프 추신신 문학이론가 겸 시인 임화와 결혼했다. 1940년 문학평론가 백천의 추천으로 〈결별〉을 《문장》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결별〉을 포함해 〈체향초(滯鄕抄)〉(1941), 〈가을〉(1941), 〈산길〉(1942), 〈도정(道程)〉(1946), 〈광나루〉(1947), 〈종매(從妹)〉(1948), 〈양〉(1948) 을 발표하여,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습니다.


얼마 전 지하련 선생님의 집이 불에 타는 사고가 있었는데. 우리 동아리에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임화 선생님은 이곳에서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지하련 선생님도 저평가 되어서 너무나 슬펐지만 여성을 연구하는 나로서는 마산지역 여성 문인들을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산 박물관과 문신 미술관

1910년 초반에 한반도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수도 시설 정비가 필요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팔용산에서 환주산까지 자연 유압식으로 기계 펌핑없이 물을 끌어다 썼다고 합니다. 정수장은 당시 주요 시설이라 이 산을 수도산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하네요. 

마산박물관으로 올라가는 중간 쯤 길 위에 전시 된 김종영 조각가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올라 오니 생경한 현판 2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이토마코토와 마산 부윤이 주고 받은 글자인데 처음 보는 비석이었습니다. 사실 그냥 아무렇게나 던졌 놓듯이 배치하면 좋겠다는 이사님 말씀이 더 공감 갔습니다.

삼광청주의 솥이 마산박물관 앞에 걸려 있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시절 교수님이 삼광청주에 대해 학생들에게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논문 중에 마산의 술에 관한 논문이 있습니다. 관심있으면 읽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박물관 앞마당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님의 후학들의 글을 세긴 돌비도 있었습니다. 마산박물관은 회원성지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김성일의 일화도 있었고 둘레길도 잘 조성되어 있어가보면 좋겠다 생각도 했습니다. 

마산박물관 윗 쪽에는 문신미술관이 있습니다. 현재 조각 비엔날레도 하는데 가을이랑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미술관 컨셉이 주변 아파트에 의해 가려져 너무 슬펐습니다. 어느 순간 마산이 아파트 밭이 되어 버렸습니다.

꼬부랑길을 올라가 위에서 내려다 보니 성호초등학교가 보였습니다. 내가 나온 회원초등학교도 성호초등학교로부터 나온 초등학교입니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포교당도 살펴보고 왔습니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되어버린 포교당 모습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뒷풀이는 우정아구찜이지요."

우정아구찜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마산에 살았지만 마산 아구찜의 명물인 건아구찜은 내 취향은 아니였습니다. 건아구찜은 할머니께서 좋아하셨습니다. ‘냄새가 꼬릿꼬릿한 것이 내취향이 아니다’라는 말에 웃으셨던 할머니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전분기 없는 아구찜은 오랜만이었습니다.

회원분들이 제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관심있게 물어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요즘 논문 보면서 울컥 울컥했는데 내가 글을 잘못 쓰면 역사왜곡인 검증을 해야 하는데 물어볼 길도 없고 어디다가 물어야 하는지 답답했습니다. 지도 교수님께서 역사학 논문이 아니니 조금은 자유롭게 생각해도 좋다고 하셨지만. 내가 쓴 논문은 기존에 아무도 연구하지 않았던 지역의 여공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글을 써버리면 이것은 잘못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사님께서 연구의 중요성도 알아봐 주시고 회원님들께서 도와주신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감동입니다. 조정림 국장님 진짜 진짜 감사합니다. 

신입 회원인 심우진님은 어느 지역을 가든 미술관과 박물관은 꼭 간다고 합니다.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와문화’ 정기 모임에는 거의 참석이 힘들지만, 석사 논문을 마치고 나면 ‘역사와문화’를 통해 지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게 되었습니다.

마산을 떠날 기회는 많았지만 결국 여기에 남게 된 것은 이런 활동을 하라는 운명이 아니였을까요? 동기들 중 내가 실력이 제일 없었지만 동기들은 ‘너가 해야한다’고 입을 모아 말해줬습니다. 앞으로 용기를 갖고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한자는 다시 공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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