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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YMCA

마산Y 총무가 겪은 부마항쟁 전후

by 이윤기 2023. 7. 26.
이번 회원 인터뷰는 부마민주항쟁 체험 수기집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에 실린 지태영 전 마산YMCA 총무님의 수기입니다. 지태영 전 총무님은 부마항쟁 시기에 마산YMCA 총무로 근무 하였습니다. 

글쓴이: 지태영 전 마산YMCA 총무(1978. 10 ~ 1983. 3)

 


1. 부마민주항쟁의 의의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시민과 학생들이 박정희 제4공화국 체제의 유신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난민주화운동이다. 1970년대 유신체제의 폭압 속에서 자유와 민주, 정의를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사실상 유신독재의 붕괴를 촉발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2. 부마민주항쟁의 의미
1979년 10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군부독재에 맞서 부산대학교에서 시작한 항거는 부산의 도심으로 번졌고, 18일에는 마산으로까지 나아가 유신독재 최초이자 최대의 시민항쟁으로 타올랐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 시기에 부산과 마산의 시민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18년군부독재가 무너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부마민주항쟁의 10월 정신은 이듬해(1980년)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은 더욱 강력해졌다. 1979년 10월 부마와 1980년 5월 광주는 모두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6월 전국적인 규모로 계승되어 군부독재(군 출신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를 영원히 몰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은 5·18과 쌍생아이며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부마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군부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고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면면히 이어질 수 있게 한 시발점이자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정신이 계승되어 평범한 시민이 이 나라의 진짜 주인임을알게 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살아 있는 역사이다.

3. 부마민주항쟁의 배경
  1)유신체제 한계에 봉착하다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1979년 한계에 이르렀다. 반정부 인사들에대한 연행, 체포, 고문, 연금 등의 탄압 속에서 야당(신민당)과 재야 세력의저항이 고조되었다. 1979년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 부당 폐업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22세의 여성노동자가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1979년 10월 초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유신독재를 강력히 비판하였고, 이를 빌미로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을의원직에서 제명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시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유신독재와 공화당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 분노가 부산과 마산에서대규모 항쟁으로 나타났다.

  2)부산 · 마산 지역의 경기 침체
1979년대 말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물가가 상승하고 경기가 침체되었으며, 불황으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경제적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저임금 노동자를 바탕으로 한 수출 지향적 경공업 도시였던 부산과 마산이었다. 정부는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없게 됐다. 이러한 부가가치세 도입은 사회적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4. 부마민주항쟁의 진전상황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자 박정희 정부는 강경책으로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마산으로 확산된 항쟁
1979년 10월 18일 부산에서 전개된 항쟁이 마산으로 퍼졌다. 1,000여명의 경남대학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 시민과 마산 YMCA 청년 등과 합세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파출소, 민주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투석해 유리창을 깨뜨리고 기물에 지르기도 했다.


다음 날인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날 저녁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병설공업전문대학, 그리고 마산YMCA 청년 회원들, 고교 Y(각 고등학교에 조직된 high Y 학생들이 합세) 약 8,000여 명에 이르렀다. 10월 20일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에 위수령(육군 부대가 일정한 지역에 주둔하여, 경비와 질서유지 및 군기의 감시와 군에 딸린 건축물, 시설물 등을 보호할 것을 규정한 것으로 1970년에 대통령령으로 제정하였다.)을 발동하여 마산지역 작전 사령부는 마산 일원에 군을 동원하여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5. 당시의 마산은
1) 한일합섬
마산 양덕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섬유공장으로 2만 5,000여 명의 여성 청소년 노동자들이 취업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는 한일여고를 설립하여 3교대로 일하며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2) 마산수출자유지역
당시 마산 양덕동과 봉암동 해안 매립지에 위치한 50만 평에 조성된 우리나라 1호 외국인 관리공단으로 1970년에 2만 5,0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취업하여 고용증대 효과를 보았다.

3) 창원기계공업지구
창원국가산업단지라고 하여 2만 5,729m² 부지에 1974년 초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이후 2,871 개 업체가 입주하여 가동되면서 전국에서 공고 졸업생들이 12만 명 넘게 취업했는데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6. 마산YMCA 상황과 내가 겪은 부마항쟁 전후

마산 창신공고에서 10여 년을 교사로 일하면서 연구과장, 교무과장, 학생과장을 지낸 나는 1970년대 후반 뜻한 바가 있어 마산YMCA 총무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렇게 내가 취임하면서 YMCA 회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창신공고는 학년별로 12학급이라 매년 졸업생이 700명 이상이었는데 거의가 수출자유지역이나, 창원기계공단에 취업하게 되면서 많은 청년들이 과거 창신공고 선생님이 총무를 맡고 있다는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전해지니 많은 청년들이 YMCA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약 2,000여 명에 이르는 회원들의 신앙교육과 취미활동을 통하여 건전한 청소년 문화를 기르고 탈선하는 청소년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능한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어 간사(직원)를 채용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 지도를 위하여 황주석 간사(한국신학대학 출신), 여성회원들의 사회적 책임을 가르치기 위하여는 정혜란 간사(이화여대 법학과 출신)를 그리고 이상익 간사(한양대, 한국신학대 졸)는 신앙교육과 취미활동 지도를 위하여 채용하였습니다.


당시 마산여상(현 무학여고) 교장으로 있던 서익수 이사장을 비롯하여 20여 명의 이사(각 교회 장로들), 그 외 YMCA를 지원하는 와이즈맨즈 클럽이지도층 인사들로 구성되어 YMCA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그 당시열심히 활동하던 회원 중에는 창신고 출신인 허정도전 YMCA 전국회장), 김종대(전 창원시의회 의원) 등의 활약이 돋보이기도 했습니다.


1979년 10월 18일과 19일 부산에 이어 마산에서도 민주화 항쟁이 시작되었는데 첫날부터 수천 명의 데모대 중에 고등학교 제자들과 YMCA회원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의 귀에 들어왔으며, 마산 시내 중요거리마다 트럭들이 자갈을 실어다 놓았고 밤에는 아줌마와 할머니들이 사이다. 콜라 등을 들고 나와 청년들의 목을 축여 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거나데모대원들이 경찰에 밀려 쫓기게 되면 시민들은 자기 집에 숨겨 주기도하는 등 전 시민운동의 양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때 마산 시내는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되었는데 데모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검거된 160명 가운데 학생은 16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민간인들로나타나 시민들의 광범한 참여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YMCA 총무인 나는 심한 감시 대상이었습니다(마산문창교회 장로 고려대 출신, 해병대 출신 이 모두가 데모 주동꾼으로 판단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산경찰서 종교담당 형사 한 분과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한 분, 이두 분이 매일 아침 Y사무실로 출근하여 나와 간사들의 일과를 체크하여 상부에 보고하기를 10년이 지나도록 계속한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집에 드나드는 사람들까지 조사대상이 되었습니다.

 

19세기 말인 1889년부터 경남 지방을 선교했던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1980년대 초 선교사들이 철수하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교단),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대한기독교 감리회와 선교협력 자매관계를 맺어, 매년각 교단 총회 시에는 호주 선교부 총회의 총무를 초청하곤 했습니다. 나는창신학교에 근무할 때부터 선교사들과 친분 있게 지냈기에 이 분들이 한국방문 2-3개월 전에 연락이 와서는 한국에서 총회 일정이 끝나면 마산으로와서 우리 집에서 2-3일 묵다가 광주로 가서 한완석(작고) 목사님 댁에서2-3일 체류하고 한국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전화가 도청되어이 분이 우리 집에 온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 왜 너의 집에 오느냐고 따지곤했는데, 내가 집에 없을 때는 내 아내에게 전화해서 쌍소리를 하면서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1980년 8월, 제8회 세계 청소년대회(YMCA 세계총회)가 미국 콜로라도산장에서 개최될 때 한국YMCA연맹에서 나를 한국대표단의 한 사람으로선정했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정작 나에게 여권을 내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정보부나 경찰에서 안 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제회의이기 때문에 결국은 가까스로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을 거쳐 유럽 여러 나라의 YMCA를 돌아보고 왔습니다.


1981년 한국 통합측 장로교 교단 총회에 마산의 마지막 호주선교사로계셨던 변조은(JOHN BROWN) 목사가 초청되어 와서 나의 사정을 듣고는호주로 돌아가신 다음에 편지가 왔습니다. 한국의 정치가 정상이 될 때까지 호주로 와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권한다고 하면서 학비는 선교부에서 부담하고 생활비는 시드니 한인교회들이 부담한다고 하여 고심 끝에 가기로 결심하고 여권 신청을 했는데 2달짜리 단기여권을 주면서 현지 영사관에 가서 연장을 받으라면서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다시 부마민주항쟁 현장으로 돌아가 보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부산의 시위현장을 돌아보고 서울에 가서 대통령에게 시위상황을 보고할 때 대학생들의 시위라기보다는 전 시민이 참여한 양상으로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강경진압을 주장하는 대통령 경호실장인 차지철 편과 그래서는 많은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중앙정보부장과의 의견 충돌 끝에 김재규 정보부장이 차지철 너부터 죽어야한다고 권총을 꺼내들고 발사하자 대통령 경호원들과 정보부 요원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박정희 대통령도 서거한 것이 10월 26일 궁정동안가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부마민주항쟁이 박정희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것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부마사태만 강조하다 보니 박정희 대통령은 아주 나쁜 대통령으로 이해되기 쉬운데,독재자라는 면모와 별개로 우리나라가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기틀을 놓았다는 점은 별도로 평가해야 하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요?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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