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YMCA 부활절 서신(번역)
세계 YMCA 연맹 사무총장 카를로스 산비가 전 세계 YMCA 운동에 보내는 부활절 서신
- 2026년 3월 31일, 제네바
“우리는 이미 하나된 공동체이지만, 우리의 분열적 본능이 그 사실을 가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매년 세계 YMCA 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전 세계 YMCA 공동체에 부활절 메시지를 전해 왔습니다. 이 전통은 제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루는 중심에 기독교적 뿌리가 있음을 되새기게 해 주며, 동시에 단순한 책임자가 아니라 같은 믿음과 가치를 살아가는 동역자로서 여러분께 다가갈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와 같은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이 사순절의 시간, 곧 YMCA 전체가 함께 깊이 분별해 온 이 여정은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고백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나누고자 하는 글은 이 시간을 통해 제가 경험한 내면의 여정이며, 동시에 우리가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방향에 대한 진솔한 고백입니다.
사순절, 답이 아니라 질문의 시간
사순절은 우리를 편안함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는 답을 찾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시간입니다. 자기 방어가 아니라 자기 성찰의 시간, 광야와 침묵, 그리고 자신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세우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번 사순절 동안 저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성찰의 자리로 이끌렸습니다. 이는 2023년부터 2025년까지 진행된 ‘21세기 YMCA 기독교 정체성’에 대한 전 세계적 대화 이후, 2026년 2월부터 3월까지 두 달간 진행된 협의 과정의 결과를 마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30개 이상의 국가 YMCA와 약 700여 명이 참여한 이 대화의 응답들을 천천히 읽으며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선한 의지와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묵상의 자리에서, 저는 한 가지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이는 사무총장으로서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같은 고민과 씨름을 함께하고 있는 한 사람의 형제로서 드리는 고백입니다.

제 고향 토고가 가르쳐 준 한 가지
저는 여러 부족이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나라 토고에서 태어났습니다. 해외에서는 우리는 하나의 ‘토고인’으로 서로를 따뜻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부족의 정체성이 다시 드러나고, 공동체적 정체성은 뒤로 물러납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부족에 따라 나뉘기도 합니다. 이번 YMCA 기독교 정체성 대화를 통해 저는 우리 글로벌 YMCA 안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국제회의에서는 서로를 하나로 품지만, 우리가 무엇을 함께 믿는지를 공식화하려 할 때 우리는 다시 묻기 시작합니다.
누구의 표현이 옳은가?
어떤 방식이 기준이 되는가?
중심을 정의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말은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부족적 본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YMCA의 ‘깃발’

토고를 비롯한 모든 나라는 하나의 깃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깃발은 부족을 넘어 하나의 국민으로 우리를 묶어 줍니다. 저는 ‘YMCA라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개념 또한 소중하게 여깁니다. 하나의 공동체에는 어느 특정 집단의 것이 아닌 상징이 필요합니다. YMCA에게 그 상징은 1891년부터 이어져 온 삼각형입니다. 처음에는 붉은색 삼각형이었고,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그렇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색과 디자인은 변해 왔지만, 그 형태와 의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몸, 마음, 영혼’ 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세속적 건강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믿음, 몸이 거룩하다는 믿음,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영혼이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자리라는 믿음에 뿌리를 둔 깊은 기독교적 인간 이해입니다. YMCA의 삼각형은 이 모든 의미를 문화와 언어, 그리고 다양한 표현을 넘어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깃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을 직면하기
이번 사순절 동안 나누었던 여러 대화의 이면에는 한 가지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기독교 정체성 논의가 182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 YMCA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저는 이 두려움을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 붙여지지 않은 두려움이 우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을 오래 바라보며 묵상하는 가운데, 저는 30여 년 전 르완다에서 일어난 일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부족적 본능은 점검되지 않을 때 단순히 나누는 것을 넘어 파괴합니다.
저는 이 사례를 가볍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살아온 시대 속에서 부족적 본능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비극적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아왔고, 같은 언어와 신앙, 같은 땅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세대를 거쳐 형성된 경계에 따라 서로를 향해 돌아섰습니다. 교회 역시 그 과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정체성은 그것을 막지 못했으며, 어떤 곳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가속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YMCA가 르완다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본능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존재합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정직한 대화가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여 마주하지 않는 대화 아래에서 작동하는, 점검되지 않은 부족적 본능입니다.
참된 자아와 거짓된 자아
프란치스코회 사제이자 신학자인 리처드 로어는 ‘거짓된 자아’와 ‘참된 자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거짓된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집단을 통해 확인하려 하며, 다른 이들을 낮춤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합니다. 반면 참된 자아는 이미 사랑받고 온전하기에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집니다. 로어는 조직화된 종교가 가장 나쁜 모습일 때, 이 거짓된 자아를 변화시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강화한다고 말합니다. 부족적 본능에 신학적 언어를 부여하고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활은 역사 속에서 거짓된 자아를 가장 근본적으로 끊어내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부족적 본능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으신 선택이며, 부활은 참된 자아에 뿌리내린 사랑이 결코 파괴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얼굴을 가진 가치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문화가 만들어 놓은 모든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사마리아인, 세리, 우물가의 여인에게로 먼저 다가갔고, 그때마다 경계는 무너졌습니다.
YMCA의 가치는 추상적이거나 생명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름과 얼굴을 가진 가치입니다. 그것은 가장 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조건 없이 사랑하신 한 분에게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저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의 가능성은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기독교인이어야만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것은, 세상이 목격한 가장 급진적이고 완전한 사랑의 드러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족의 경계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받은 그대로 자유롭게 나누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서 조건 있는 사랑을 나누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YMCA의 삼각형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묻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느 부족 출신입니까?” 그것은 묻습니다. “당신은 인간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곳에 속해 있습니다.
앞으로의 길: 갈보리에서 부활로

우리는 반드시 분열로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21세기 YMCA 기독교 정체성’ 대화의 결과가 부활의 순간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YMCA 공동체가 부족이 아니라 사랑을, 자기보호가 아니라 변화를, 거짓된 자아가 아니라 참된 자아를 선택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없이 오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우리의 구조와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부족적 본능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다른 선택을 하는 용기입니다. 이 기독교 정체성에 대한 대화는 YMCA 공동체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우리가 문서 이전의 차원에서, 공동체로서 우리는 누구인지를 묻는 초대입니다. 우리의 근본에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이 실제로 우리를 이끌도록 하는 초대입니다. 그것을 구호가 아니라 실천으로, 벽에 걸린 가치가 아니라 낯선 이 안에서도 발견하고 선택하는 얼굴로 살아내는 초대입니다. 지금 이 대화가 잠시 멈춰 있는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은 길을 찾는 과정 역시 필요합니다.
이제 다시 숨을 고르며,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삼각형은 우리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두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은 우리의 헌법입니다.
우리가 세워가고 있는 YMCA 공동체는, 각자의 모습 그대로 먼저 사랑받았기에 속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1844년 조지 윌리엄스가 바라보았던 운동이며, 우리가 여전히 이루어 갈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이 글을 전 세계 YMCA 공동체의 모든 분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는 분들뿐 아니라, 그 신앙이 만들어 내는 가치에 헌신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적 본능이 지금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 되어 있습니다. 사순절은 길었고, 고난주간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랑은 우리가 쌓아온 모든 벽보다 강합니다.
이 여정을 함께하며,
카를로스 산비
세계 YMCA 연맹 사무총장
세계YMCA 영어 원문 링크 주소 https://url.kr/rf2v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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