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나러 갑니다. 이번 달에는 마산YMCA 최초의 상근 총무를 지낸 남행수 선생 묘소를 다녀왔습니다. 남행수 선생(1917.5.23 -1997.4.1)은 1949년 12월 15일 취임하여 1964년 3월까지 약 14년 3개월 동안 마산YMCA 총무(현 사무총장)를 지냈습니다. 올해는 마산YMCA 창립 80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 5년 전 마산YMCA80년사를 준비를 시작하면서 남행수 총무 묘소 참배를 마음먹었습니다만, 차일피일 미루다 7월 17일 제헌절 오전에 다녀왔습니다. 무작정 찾아 나선 길이라 못 찾으면 다음에 다시 가겠다고 마음 먹고 갔는데, 같은 마을에 사는 이무식 창원시의원의 도움으로 녹음이 우거진 백월산(428m) 자락에 있는 선생의 묘를 찾아 참배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
남행수 선생(1917.5.23 -1997.4.1)은 1949년 12월 15일 취임하여 1964년 3월까지 약 14년 3개월 동안 마산YMCA 총무(현 사무총장)를 지냈다. 남행수 선생이 현존하는 마산YMCA 공식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49년 4월 19일 이사회 자료이다.
이 자료에 선생은 김복록 위원장이 맡고 있던 소년부 위원으로 참여하였는데, 남행수, 최삼영, 김성규, 한은동, 김낙성 5인이 위원이었다. 아마 마산YMCA 이사로 참여하던 중에 최초의 유급 총무로 선임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창립 3년 6개월 이후에 최초의 전임 총무로 취임하여 이후 14년 동안 마산YMCA의 초기 활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2026년 7월 17일 제헌절 오전 오랫 동안 미루어왔던 남행수 총무 묘소 참배를 나섰다. 인터넷에서 검색으로 찾은 몇 가지 단서만 가지고 무작정 의창구 북면 월백리로 찾아 갔다. 지리산 문수암이라는 카페 2009년 9월 7일에 포스팅한 글 「구룡산 가는 날 에 남행수 선생 공적비와 말년을 보냈던 자택 사진이 나와 있었다. 아울러 통영한아름산악회 카페, 2007년 4월 2일자로 포스팅된 글 「 고 남행수 선생님 10주기 추도식 및 제막식 다녀왔습니다」에 나와 있는 추모비 사진과 기록만 들고 길을 나섰다.
7월 17일 제헌절 남행수 총무를 찾아나서다
아침 10시쯤 집을 출발하여 두 군데 카페에 있는 사진과 기록을 단서로 지도를 검색하여 어렵지 않게 10시 25분쯤 남백마을회관(남백경로당)에 도착하였다. 남백마을 버스종점(23번)에 마을회관(경로당)이 자리하고 있었고, 마을 회관 옆에는 '남백정'이라는 정자와 나란히 남인수 선생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지금 마을회관 건물은 선생이 직접 건립하였으며, 2층은 선생이 살았던 주택이었고, 1층은 마을 회관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돌아가실 때 건물 전체를 마을에 기증하셨고, 선생의 뜻을 기려 마을주민들이 추모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남행수 선생은 1917년 5월 23일 창원군 북면 남백에서 명문 의령남씨의 후예로 문의공 남휘 실의 16세손이며 계광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를 이 곳에서 보내며 용기와 힘을 키웠으며 재능이 뛰어나 일찍이 마산창신중학 2년을 졸업하고, 평안북도 신성중학교 5년을 졸업,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광복 후 문교부 장관에 내정되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고 마산창신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여 2세 교육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마산 라이온스클럽에서 24년간 헌신하면서 마산산악회를 창립하였고, 경남산악회 지부장에 피선되어 12년간 역임하면서 무학산 녹지 600여평에 산악인의 숲을 조성하여 경남산악인의 위상 정립에 노력하였다. 또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마산산악인이 등정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마산을 한국 제일의 산악도시로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았다.
70세의 고령에도 도내 최고봉 75좌를 단독 산행하고 알프스 마테호른 등정에 나서는 투지를 보여줄 만큼 선생은 한국산악인의 지주로 살았다. 대한산악연맹 금상, 경상남도 자연보호 공로상, 경상남도 문화상, 대한산악연맹 지리대상 등을 수상한 선생은 근검 절약해 마련한 전 재산(이곳 대지 452평에 상하층 50평 건물)을 마을에 기증하고 1997년 4월 1일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시니 이 큰 뜻을 만세에 기리고자 주민의 뜻을 모아 4척 추모비를 세운다. - 2001년 5월 5일
무작정 찾아 나선 길이라 묘소를 찾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추모비를 살펴보고 길을 묻기 위해 마을로 들어섰지만 워낙 더운 날씨 탓인지 골목에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무작정 동네를 한바퀴 돌다가 담장 너머로 사람이 보이길래 남행수 선생을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북면을 지역구로 둔 이무식 의원 집을 알려주었다. 알려준대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더니 인적이 없던 집에서 부인이 나와 맞아주셨고 이무식 의원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었다.
마을에서 약 6km 떨어진 북면화천민원센터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이무식 의원을 만났다. 남행수 선생을 찾아온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묘소를 여러 번 다녀왔었다면서 스마트폰 지도를 펼쳐놓고 약도를 상세히 그려 주었다. 아래 지도에 168번지는 이 의원께서 잘못 기억하신 듯하다. 나중에 지적도를 찾아보니 180-1번지였다.


녹음이 우거진 7월, 난생 처음 가는 백월산 숲속에서 남행수 총무의 묘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월백리 180-1 농장 근처에 주차를 하고 농로를 따라 산속으로 5분쯤 걸어 가니 약도에 그려 준 계단이 나타났다.(여기까지는 쉬웠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30~40미터쯤 산을 올랐는데, 길은 끊기고 풀로 뒤덮힌 숲이 나타났다. 긴 바지를 입고 오지 않은 걸 후회하면서 날카로운 풀들에 발목이 계속 쓸렸다. 계단 길이 끊어진 곳부터 잡목이 우거져 옛길의 흔적도 사라졌다. 길은 없었지만 윗쪽으로 올라가니 금새 무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 의원이 알려준 세례명이 적힌 묘비는 아니었다. 땀을 뻘뻘흘리며 덤불을 헤치고 들어가니 이쪽 저쪽으로 의령남씨 묘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세례명 적힌 묘비는 찾을 수 없었다.
길을 모르니 우선 약도를 보면서 세례명 적힌 묘비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니면서 계속 산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더 이상 묘지가 보이지 않으면서 소나무 재선충 방재 훈증 더미들이 나타났습니다. 작은 오솔길 흔적을 따라 정상 바로 아래까지 갔지만 더 이상 무덤을 없어 돌아내려왔습니다.


내려 오는 길에 못 찾으면 겨울에 다시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천천히 올라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왔습니다. 올라가면서 봤던 무덤 표지석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보면서 내려오다 처음 발견했던 묘지 근처에서 좌우를 살피다가 얕은 철조망 펜스를 발견하였습니다. 약도를 그려 줄 때 이무식 시의원이 '펜스'가 쳐져 있다고 했던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 높이 자란 풀을 헤치다보니 무덤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석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마을회관 앞 추모비에 새겨진 "계광의 아들로 태어나"라는 이름과 일치하였습니다. 선생의 아버지이신 남계광 장로와 어머니 김명광 집사의 묘비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1971년 5월 14일에 아버지께서는 1979년 11월 25일에 소천하셨는데, 남행수 총무께서 고향 마을로 귀향하여 1987년에 묘비를 세운 것으로 짐작됩니다.

부모님 묘비를 찾고나서 다시 수풀을 헤치며 주위를 둘러보다, 통영한아름산악회 카페, 2007년 4월 2일자로 포스팅된 글 「 고 남행수 선생님 10주기 추도식 및 제막식 다녀왔습니다」에 나와 있는 참배 사진에 나와 있는 작은 석사자상을 발견하였습니다. 남총무님 무덤 자리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고, 풀숲을 이러저리 헤치다보니 조화 리본이 보였습니다. 2007년 추모비를 세울 때 가져왔던 조화 리본이었던 것 같은데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조화 리본 주변을 이러저리 뒤지다보니 예상대로 대리석 추모비가 있었습니다. "산악인 남행수 선생 지묘" 2007년 4월 1일에 세워진 추모비였습니다.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선생님은 산악인의 참 스승이셨습니다. 10주기를 맞아 생전에 가르치신 산악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이 비를 세웁니다. 2007년 4월 1일

안타깝게도 그동안 남행수 선생의 마산YMCA 총무 행적은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책임은 마산YMCA 후배들에게 있겠지요. 올해 마산YMCA 80년사가 출간되면 창립 이후 초창기 YMCA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로서 남행수 선생의 활동이 상당부분 재조명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1964년 3월 퇴임 이후 7년이 지난 1971년 5월 11일 마산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창립 25주년 기념 행사에서 남행수 전 총무에게 표창장과 기념품 수여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80년사에도 담길 예정 입니다. 남총무께서 퇴임한 후 마산YMCA가 수년 동안 부침을 겪다가 1971년 무렵 새로운 재기의 틀을 갖추고 퇴임한 선배에게 뒤늦게나마 예우를 갖췄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마산YMCA는 1978년에 다시 가맹YMCA가 됩니다.)
80년사 초고에 따르면, 1978년 4월 26일 희 예식장(동성동 253)에서 일본의 저명한 무교회주의 신학자 후지사와 타케요시(藤澤武義) 초청 강연회를 개최하였다는 대목이 있는데, 후지사와 타케요시 초청에 일본대학(日本大学) 철학과 출신이면서 무교회주의 운동에 심취했던 남행수 총무와 관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선생은 전쟁 중이었던 1951년 중반 한국YMCA 대표로 3개월 간 일본연수를 다녀왔으며, 귀국후에도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의 제자들이 발간하는 『성서의 일본』을 정기구독하였을 만큼 무교회주의 운동이 관심이 깊었던 것으로 보입니다.(한국의 무교회주의 사상가로는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이 있습니다.)
산을 내려와 남백마을 이장님과 전화 통화를 하고 마침 문이 열려 있던 마을회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박영주 선생에 따르면 선생의 유품 대부분은 국립산악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그 때 제외된 라이온스 활동 기념패들이 돌보는 이 없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산YMCA 창립 8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올해 가을 어느 날 회원들과 함께 백월산 산행과 함께 남행수 선생 묘소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고 남행수 선생 약력(흰색 글씨: 한국산악계를 빛낸 50인: 월간) 1917년 5월 23일 창원군 북면 월백리 출생 창신중학교 2년, 신성중학교 5년 수학 사설강습소 운영 4년: 국민학교 전과목, 신사참배 반대건으로 강습소 폐쇄 일본 니혼내학교 철학과 수학: 내선일체 비판 1946년 한국산악회 경남지부 창립 1948년 1월 15일 한라산 적설기 등반 조난 사고 1949년 12월 15일 마산YMCA 총무 취임 1957년 마산산악회 창립, 산악인 육성 1964년 3월 마산YMCA 총무 퇴임 1965년 알피니즘 표방한 경남산악회 창립 1989년 마산산악동지회 창립의 산파 역할 1980년부터 적십자 산악안전 강습회 20년간 강의 |
▼ 아래는 남행수 총무께서 마산YMCA에 부임하기 전인 1947년에 참가했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관련 자료와 인터넷에 흩어진 선생 관련 자료들의 링크 모음 입니다.
http://www.historyfoundation.or.kr/web/portal/webzine/774/68160
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터
www.historyfoundation.or.kr
https://v.daum.net/v/LCPq8P2FI2
[단독]광복 후 첫 독도 조사 때 찍은 '강치 사진' 찾았다
1947년 광복 후 첫 울릉도·독도 대규모 학술 조사 당시 촬영한 독도 강치(바다사자) 사진이 발견됐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한국현대사)는 11일 "조선산악회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당시 촬영
v.daum.net
대한민국 외교부 1947년 독도학술 조사 사진 자료(남행수 총무는 사진작가로 참여함)
https://dokdo.mofa.go.kr/kor/pds/part04_view03.jsp
대한민국 외교부 독도
독도,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336호, 독도 동영상, 독도 사진, 독도 정부 입장, 독도 영토주권, 한국 독도
dokdo.mofa.go.kr
https://youtu.be/VVh5rQ9El2Q?si=8Ka5X0ybV99TVn05
https://s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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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oongang.co.kr/article/1028201
(2)한라산의 혼령들 | 중앙일보
한라산의 참 모습은 겨울에 있다. 11월이면 벌써 백록담에 첫눈이 내리고, 12월이면 온통 눈으로 덮여 마치 신의 나라와 같은 느낌을 준다. 해발로 치면 1950 미 기온으론 영하 30도의 한라산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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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16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2] - 월간산
한한라산 동계 초등은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 산악부가 이룩했다. 그러나 동계 첫 조난대라는 비운의 등반대이기도 하다. 용진각이라는 지명은 50년대 후반에 생긴 것이고, 경성제대 보고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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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jeju.kaf.or.kr/data_01/420?sst=wr_hit&sod=desc&sop=and&page=2
한라산 조난 그 자취 > 문서자료실 | 제주특별자치도산악연맹
*서재철 기자님이 쓴 한라산 조난 그 자취 2번째.한국산악회(韓國山岳會) 전탁(田鐸)씨 조난(1948년 1월6일~22일)전탁씨의 조난은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으론 첫 조난사고였다. 그는 특이한 한라산의
jeju.kaf.or.kr
사)부산산악포럼 >온라인책보기> MOUNTAIN FORUM 통권 제4호> 인물 재조명 경남산악계의 대부 남행(최재일)
http://www.bmf2003.or.kr/program/bbs/board.php?bo_table=poosster&wr_id=4
(사)부산산악포럼 BMF2003
(사)부산산악포럼 BMF2003
bmf2003.or.kr
(남행수 선생 인터뷰 기사)
(남행수 선생 추도사)
https://cafe.daum.net/peakbook/Nhol/16
백령회
백령회조장빈 Ⅰ 아침 산책 후 ‘어북장국’을 먹던 평양 조기회 그리고 서울에서는 취운정을 올라 삼청공원으로 내리거나 인왕산 버드나무 약수터를 찾던 이들이 1927년 ‘무레사네’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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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routefinder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74
백령회 수장 엄흥섭의 직함은 무엇이었나 - 루트파인더스
일제하 조선인 산악인들의 모임을 대표하는 백령회의 수장은 엄흥섭이었다. 그는 연령대도 조금 높았고, 인품도 훌륭했고 회의 여러 사업을 추진하는데 자금면에서도 통크게 베풀었다. 그의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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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회 관련하여 일제시대 YMCA의 영창중학교에 대해서 - 루트파인더스
우연히 백령회 관련하여 소소한 자료를 발견하였다. 혹시라도 관심있을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여기에 올려본다.일제하 조선인 산악단체였던 백령회 회장 엄흥섭은 당시 명문이었던 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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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행수 총무가 마산YMCA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산악회 활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행수 총무는 한국산악회(초대 회장: 송석하가 창립되자 마자 회원으로 가입하였는데, 2대 회장이 서울YMCA 총무였던 현동완 선생이다. 남행수 총무는 한국산악회가 주관하는 1948년 1월 15일 한라산적설기 등반에 참여하여 조난 사고로 오른쪽 발가락을 모두 잃었다. 사고를 딛고 몸을 회복한 후 마산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창신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후 마산YMCA 총무를 겸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7년 생인 남행수 선생은 마산창신중학 2년을 졸업하고, 평안북도 신성중학교 (5년)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교 철학과에서 수학하였다. 평안북도 신성중학교는 백낙준(1895-1985 연세대 총장), 계훈제(1921-1999), 장준하(1918-1975) 등이 신성중학교 출신이다.
1918년에 태어난 장준하 선생이 평양 숭실중학교 1년을 다니고, 부친인 장석인 선생이 신성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하게 되어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1921년에 태어난 계훈제 선생은 16살이 되던 1934년에 신성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장준하 선생은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남행수 선생은 계훈제, 장준하 선생과 같은 시기에 신성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함석헌(1901~1989) 선생은 남행수, 계훈제, 장준하 선생이 신성중학교에서 수학하던 무렵, 평북 정주의 오산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함도깨비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남행수 선생은 1901년 생인 신성중학교 재학시절 함석헌, 김교신 등으로부터 무교회주의 신학을 접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https://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99
할 말이 있다 - 에큐메니안
장준하, 안병욱(安炳煜)을 대동 함석헌을 찾다언론인으로서, 출판인으로서 장준하가 함석헌을 만난 것은 장준하의 생애에 더할 수 없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더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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